“변기에 머리 감으면 1000원” 구걸론 아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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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뭐든지 다합니다. 진심 배가 너무 고파요.”

 “조건 딱 하나 걸고 구제해줄게. 지금 연락해서 신용 및 대출 내역부터 말해봐.”

 최근 일부 인터넷 사이트를 중심으로 ‘구걸론’ 바람이 불고 있다. 구걸론(구걸+loan·대출)이란 인터넷에서 만난 상대에게 애걸이나 협박 등을 하거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돈이나 물품을 받아내는 것을 뜻하는 신조어다. 주로 ‘OO론’ 형태로 불린다.

 구걸론의 가장 대표적인 유형은 ‘시키는 것을 다하겠다’며 돈을 이체하거나 물건을 사 달라고 하는 ‘읍소형’이다. 허벅지나 다리 등 신체 일부를 사진으로 찍어 올리는 조건으로 돈을 이체받는 ‘허벅지론’을 꼽을 수 있다. 특정 신체 부위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인터넷에서 변기통에 머리를 감으면 1000원을 준다는 제안을 받고 실제 인증 사진을 올린 ‘변기론’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식당에서 국밥·라면 등 음식을 시킨 뒤 ‘돈이 없어 계산을 못한다’는 글과 사진을 함께 올리면 음식값을 보내주는 ‘식당론’이나 절박한 사연을 올리면 필요한 금액을 보내주는 ‘사연론’ 등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이체해주는 ‘구제형’도 있다. 자신이 부른 노래 파일을 올리면 1위를 선정해 상금을 주는 ‘노래론’이나 퀴즈 정답을 먼저 맞히는 사람에게 돈을 주는 ‘퀴즈론’도 유행이다. 노래론으로 3만원을 받았다는 한모(27)씨는 “계좌 이체 내역을 사진으로 찍어 인증 사진을 올리는 것은 필수”라고 말했다.

 구걸론이 활성화된 디시인사이드 대출갤러리엔 하루 평균 5000여 개의 글이 올라온다. 당초 대출 종류와 효율적인 상환 방법 등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지만 최근엔 구걸론·구제론을 주고받는 글이 줄지어 올라오고 있다. 대출갤러리를 종종 찾는다는 이모(27·여)씨는 “뭐든지 다한다는 점에서 ‘오늘만 사는 사람들’이란 별칭도 붙었다”고 말했다.

 구걸론에 열광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한씨는 “절박해서 아르바이트처럼 생계형 구걸을 하는 경우도 있고 단순히 재미를 위해 하는 경우도 있다”며 “소액으로 재미를 느낄 수 있어 심심할 때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저성장과 취업난의 그늘 아래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이 일종의 문화로 이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화여대 함인희(사회학과) 교수는 “청년실업이 늘고 돈을 벌기 어려워지면서 일부 젊은이 사이에서 암담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변형돼 표출된 것 같다”며 “어려운 현실이 인터넷 공간에서 ‘웃음’과 결합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근엔 일부 네티즌 사이에서 각종 사기에 악용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중고물품 거래 사이트에서 물건 사진 등을 올린 뒤 선입금을 받아 도박을 하는 ‘중고나라론’이 대표적이다. 돈을 따면 돌려주고 돈을 잃으면 잠적하는 식이다. 경찰청은 지난 4월 중고나라론을 지목해 신종 인터넷 사기를 유의하라고 안내하기도 했다. 경찰 관계자는 “인터넷 사기는 피해 금액이 크지 않아 잘 신고하지 않는다는 점을 노리는 경우가 많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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