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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토종 한국인이라 죄송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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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영어를 한국에서만 배운 주제에 영어신문 기자로 8년 일했다. 그래선지 강레오 셰프의 최근 화제 발언이 마음속 급소를 찔렀다. 인터뷰 원문에 따르면 그는 “한국에서 서양 음식을 공부하면 런던에서 한식을 배우는 거랑 똑같은 거죠. 자신이 커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자꾸 옆으로 튀는 거예요”라고 했다. 서양 음식처럼 서양 말인 영어도 본고장에서 공부했어야 한다는 건가 싶어 제 발이 저렸다. 만 24세까지 토익(TOEIC)은 990점이었지만 여권의 출입국 도장 수는 ‘0’이었다. “토종이라 죄송하다”며 석고대죄라도 해야 하나 싶다.

 영어신문 출근 첫날이 생각난다. 세상을 바꿀 기사를 쓰겠다고 의기양양했건만, 영어 이름을 쓰고 서툰 한국어를 구사하는 부장은 내게 방송 편성표를 맡겼다. 예능프로 ‘무한도전’을 ‘infinite’와 ‘endless’ 중 뭐로 번역해야 하나 고민하다 하루가 갔다. 하지만 버티면서 차차 배웠다. 이력서에 미국 소재 고등학교 이름은 없을지언정 4·19와 5·16의 순서, 의미를 제대로 아는 게 기사 쓰는 데 더 중요하다는 걸.

 이제 한국어로 기사를 쓴 지 8년째지만 ‘토종’의 그림자는 끈질기다. 2011년 당시 출입처의 모 장관은 “토종 영어신문 기자 출신이라니, 불가사의네요”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졌다. 마치 “지구는 둥글다”라는 말처럼. 외교안보 서적 전문 N출판사도 번역을 의뢰하며 “토종이시라 신뢰도가 떨어지는 건 아시죠”라며 돌직구를 날렸다. 그런 그들도 모두 ‘토종’이다.

 강 셰프를 인터뷰하러 만났던 7년 전 여름, 그의 팔뚝의 칼자국과 화상 흉터를 기억한다. 전쟁터 같은 주방에서 일한 훈장이라고 했다. 몇 년 후, “한국인이니 한식을 알아야겠다”며 요리연구가 한복려 선생에게 조용히 수업 받는 그를 만났다. 강 셰프는 진중한 편이다. 그가 ‘토종에다 고졸’인 최현석 셰프를 악의적으로 험담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요리계에 대해 느끼는 안타까움을 표현하려다 오해를 낳았을 게다.

 출생과 성장 배경은 실력을 결정하는 지배 요소일까. 바다 건너 요리 유학을 다녀온 KBS 이욱정 PD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재능은 장소가 아닌 개인에 따라 꽃이 필지 말지 결정되더라”는 지극히 상식적이고도 바른 답을 내놨다. 그러고 보니 퓰리처상을 거머쥔 뉴욕타임스 최상훈 서울특파원도, 영어 발음 하나는 끝내주는 이보영 강사도 ‘토종’이다. 이젠 그만 죄송하련다. 죄송할 시간에 실력을 갈고 닦을 일이다. 토종이건 외래종이건 요리사는 요리사고, 기자는 기자다.

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