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조용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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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아리랑』 은 민족정신을 고취한작품으로 총독부의 검열에 통과하기 힘든 영화였지만 원작자를 김창선이라는 일본인 율수(쓰모리)의 조선이름으로 했기때문에 무사히 통과한 것이었다.이것은 앞서 말한대로 나운규가처음에 그렇게 해달라고 율수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그러나 『들쥐』 가 나운규의 이름을 써 검열에 걸려 흥행성적이 좋지 않자 진수외 간섭이 심해졌으므로 나운규는 생각을 고치지 않을수 없었다.원래 율수는 나운규를 이용해 돈을 벌 작정이었고 나운규는 일본인의 이름과 자본을 이용해만들고 싶은 작품을 만들어 보려고 하였던만큼 이렇게 서로 상반된 입장에서 출발한 제휴가 『들쥐』 사건을 계기로 서로 틈이 벌어지자 다음 영화인 『금붕어』 를꼴내고 나운규는 윤달번과 의논하고 조선시네마회사를 떠나기로결정하였다.
자금은 나운규의 지금까지의 업적을 보고 단성사의 경영주인 박승필이 출자할 의향이 있는 것을알고 있었다.
나운규는 1927년 9월 창신동에 나운규 프러덕션을 차렸는데,배우로서는 윤봉춘·신일선.금재신· 금정숙등이 있였고 촬영기사로는 이창용이 있었다.
나운규는 예정대로 『아리랑』 에감동한 박승필의 재정적 후원을얻어 『잘있거라』 (1927년) ,『옥녀』 (1928년),『사탕을 찾아서』 (l928년), 『사나이』 (1928년),『벙어리 삼룡이』 (1929년) 등 훌륭한 작품을 2년동안에 만들어 냈다.1926년『아리랑』 을 낸 뒤로부터1929년 『벙어리 삼룡이』 를 낼 때까지 우리나라 영화계는 「나운규시대」라고 부를수 있을만큼나운규의 독무대였다.
특히 처음 이름이 『두만강을 건너서』 이던것을총독부 검열당국의 간섭으로 『사탕을 찾아서』 로 고쳐 상영한 영화와 『벙어리 삼룡이』 는 영화로도 우수하였지만 흥행성적도 좋았다.
이무렵 나운규에게는 유신방이라는 애인이 생겼다. 영화 『사나이』 와 『벙어리 삼룡이』 에 여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여인인데,나운규는 이 유신방과 탈선생활을해 돈을 낭비하고 배우들간에불화릍 일으켜 필경 나운규프러덕션은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을 기회로 나운규는 동경으로 가 1년동안 머무르면서 일본영화의 현망을 시찰하고 돌아와 l930년 『아리망 후편』 ,1932년 『개화기입문』 등을 만들었으나 실패했고 다시 원산만 프러덕션에 들어가 『금강한』 과 『남편은 구비대로』 에 출연하였으나나운규가 변절해 일본사람과 공연하였다는 비난을 받았을뿐 아무 소득도 없었다.
이때 이미 나운규는 폐결핵 말기에 들어 몸이 자유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리랑 3』 을 겨우 끝내고 『황무지』 를 촬영하기위하여 부전고원까지 갔었으나 거기서 많은 토혈을 하여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나운규는 이에 굴하지않고 최후의 작품인 『오몽녀』 (1937년)의 제작에 착수하였는데, 그때 병은 더욱 침중해져 주치의가 촬영현장에 따라가 주사를놓아가면서 촬영을 진행시켰다.
나운규는 젊어서 간도에 있을때독립운동을 한 때문으로 2년동안의 옥고를 치르고 잠시 고향 회령에가있었는데,그때 폐결핵으로죽게된 아버지의 병간호률 하다가 그에게 폐병이 전염되어 그때부터 페결핵을 앓게 되었다.
그뒤 배우로서 돈이 생기면방탕을 하고 돈이 없으면 굶는 무절제한 생활을 오래하여 왔고 중년에 유신방과의 애욕생활 때문에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36세의 젊은 나이로 1937년8월평생의 친구 윤봉춘이 지켜보는가운데 영면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민족정신을, 일깨워 주는 저항정신의 작가요,영화인이었다.
『아리랑』을 비롯해 『풍운아』『들쥐』 『사탕을 찾아서』 『벙어리삼룡이』 『오몽녀』 등은 모두 압박받는 민족의 저항을 그린 작품이었다. 그는 천재적인 영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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