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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체서용」을 현대화한 등소평노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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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모택동의 혁명은 중국의 공산화이지만 그는 공산주의자이기 이전에 중국인이었다고 모택동전문가들은 말한다.
그가 비록 국제주의·세계혁명을 강조하는 외래사상을 빌어 중국을 공산화했지만 본질적으로는 민족주의자라는 얘기다.
그러나 등소평은 모택동보다 훨씬 철저하고 중국적인 민족주의자다.
등소평의 마르크스비판과 자본주의 도입은 공산주의이론의 발전과정에서 보면 특이해 보인다. 그러나 중국의 근대화나 민족주의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보면 하나의 연속된 흐름일 뿐이다.
즉 중국의 초기 근대화방식의 하나였던 중체서용의 현대적인 형태이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국적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화에 불과하다.
중국의 근대 민족주의운동은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첫단계가 아편전쟁(1840∼42년) 패배후의 양무운동이다. 서양의 우수한 기계문명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하자는 관료중심의 하향식운동이었다.
그들은 당시 중국을 패배시킨 서양의 우월성은 물질문명 뿐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중국의 전통적인 통치제도와 사상의 근본인 전제군주제와 유학사상은 그대로 두고 정책만 서양것을 취한다는 태도였다. 이것이 중체서용이다.
다음 단계는 청일전쟁(1894∼95) 패배후의 변법운동이다. 강유위·양계초등 개혁적인 지식인들이 주도했다.
양무파보다 일보 전진하여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고치고 의회제도를 도입코자 했다. 유학의 침체성을 지적, 이를 쇄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명치유신이 변법파의 개혁모델이었다.
세째 단계가 손문의 신해혁명이다. 이것은 노일전쟁(1904∼5)에서 소국 일본이 대국 러시아를 눌러 이긴데 충격을 받고 시작됐다.
손문은 만주족의 청조를 폭력으로 타도하고 서구식 공화제를 도입했다. 이것은 중국에 있어서의 부르좌민주주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할거적·봉건적인 군벌세력과 타협함으로써 서구형 근대화운동 역시 실패로 끝났다.
더구나 1차대전후의 파리강화회의에서 서구 전승국가들이 중국의 호소를 묵살하고 중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적 요구를 들어주자 중국지식청년들은 부르좌민주국가들에 더 큰 환멸을 느꼈다.
그 대안으로 나온 것이 네번째 단계의 공산주의운동이었다. 서구에 실망한 중국의 급진적 지식인들은 반식민·반제국을 내건 동구형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통해 독립과 근대화를 실현코자 했다.
그처럼 중국 공산주의는 민족주의운동의 연속이었다. 중국민족주의가 보다 높은 상위에 서서 공산주의를 수용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것도 일종의 중체서용이다.
그러나 근대화단계의 진전에 따라 중국의 전통적인 제도와 사상은 더욱 원심화·비중국화됐다.
중국역사에 일관돼온 전제군주제가 신해혁명으로 소멸돼 통치체제는 서구화됐다. 중국의 서구화편향은 이때가 절정이었다. 공산화이후엔 통치제도가 동구화됐다.
유교에 대한 평가도 점점 낮아져 모택동말기엔 비임비공운동이 일어나 공자는 임표와 함께 비판·탈권됐다. 이때는 중국의 동구편향의 절정기였다.
비공은 주은래·등소평등 주자파를 공격키 위한 모택동4인방의 정치음모이긴 하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유교의 종속화임엔 틀림없다.
등소평의 실용주의노선은 이같은 비중국화를 다시 중국화시키려는 중화민족주의의 표현이다.
등소평복권후 공자는 복권됐다. 인민일보는 마르크시즘의 한계를 공공연히 거론하고 있다. 서구형과 동구형사이에서의 중국의 방황은 끝나가고 있다.
등소평은 모든 이론은 실천을 통해서만 진리임이 입증된다고 말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사상도 하나의 이론일 뿐 진리가 아니기때문에 만약 실제 상황(4대근대화계획)에 맞지 않으면 생명력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실용주의파들을 실천파라고도 부른다. 실천파에 대한 반대파가 이른바 범시파다.
범시파는 모택동엔 과오가 없다고 주장한다. 『모택동이 긍정한 것을 우리가 부정해서는 안되고 모택동이 부정한 것을 우리가 긍정해서는 안된다』고한 왕동여의 모택동맹신주의는 범시론의 상징이다. 이선념·화국봉등이 범시파에 속한다.
그러나 실천파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사상의 절대성과 무류성을 배척할 뿐이지 그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등소평도 양무파처럼 서방에서 배울 것은 경제와 기술뿐이라고 믿고 있다. 따라서 유교나 지금의 중공제도는 서구의 사상이나 제도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한다.
등소평은 전통적인 중국사상인 유학을 토대로 하고 통치체제는 공산주의에서, 근대화정책은 자본주의에서 구한다. 즉 세계 주요사상을 모두 중화민족주의속에 흡수·소화시키고 있다.
그는 이 큰 체계안에서 현대중국의 최대과제인 근대화와 통일을 함께 성취하려는 대망을 밀어 나가고 있다.
중공이 자본주의 홍콩과 마카오등을 흡수·통일하려면 미리 어느 정도 스스로 자본주의화하지 않을 수 없다.
등소평의 통일원칙인 1국양제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그는 이것을 분단문제 해결의 「보편적 원리」라고 주장하면서 한반도에도 적용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아직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등한 공존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공산주의에 의한 자본주의의 흡수·통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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