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메르스 확산의 주범은 후진적 시민의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황세희
황세희 기자 중앙일보 전문기자
황세희
국립중앙의료원
소아청소년과 의사

중동발 불청객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바이러스가 한 달 이상 대한민국을 전방위로 강타하고 있다. 살을 에는 한겨울 추위에도 유커의 물결로 발 디딜 틈을 찾기 힘들던 명동 거리는 행인보다 상인이 더 많은 모습이다. 비단 명동길뿐이랴. 관광산업 등 서비스산업을 필두로 시작된 메르스 불황의 손실액 규모는 현 상황이 7월 말에 종결돼도 10조원, 8월 말까지 갈 경우 20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급기야 정부에서는 ‘15조원+α’ 규모의 메르스 추경안을 검토하고 있다.

 돌발적 위기상황에서 응급처방은 나왔지만 메르스 사태로 직간접적인 피해를 본 사람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자연스럽게 국민의 분노는 상황을 이 지경으로까지 몰고 간 원인을 향해 폭발하는 중이다. IT 강국의 시민들이 너나없이 동참해 SNS를 통해 메르스 확산 원인을 파고들며 공분에 불을 지피고 있다.

 초기 대응에 실패한 방역 당국은 당연히 ‘공공의 적’이 됐다. 불운하게도 최초 감염자와 수퍼 전파자가 응급실을 찾았던 삼성의료원도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병원 책임자는 물론 그룹 오너까지 나서서 머리를 숙이며 대국민 사과를 했다.

 저수가·고효율로 운영되는 현 의료제도의 산물인 과밀 응급실과 다인실 병상, 취약한 공공의료, 가족 간병 문화 등 각종 제도적 문제점도 부각되고 있다. 이번 사태로 방역 당국과 의료제도의 민낯이 드러났고, 그에 대한 다양한 개선책이 범정부 차원에서 나오고 있다.

 문제는 각종 제도가 완비되기만 하면, 우리 사회는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모를 다른 신종 감염병에 슬기롭게 대처할 역량이 생기느냐는 것이다.

 어떤 분야건 문제의 원인과 해결 방식은 그 공동체의 총체적인 수준을 반영한다. 메르스 사태도 마찬가지다. 제도적 문제점은 차치하고 지금까지 나타난 시민의식만 해도 경제규모 세계 11위, 교육 수준은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의심케 한다.

 우선 지금도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과 그 가족들이 질병 전파자 취급을 당하면서 냉대와 왕따당하는 현실을 보자. 그들이 왕따당할 의학적 근거는 없다.

 사회 분위기가 이런데 환자와 그 가족들이라고 해서 선진적 시민의식을 보여줄 리 만무하다. 실제로 지금처럼 질병이 확산된 데에는 환자와 가족들이 의료진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았던 것도 한몫한다. 예컨대 최초 감염자는 사우디아라비아 방문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80명을 감염시킨 수퍼 전파자도 평택성모병원 진료 사실을 감췄다. 건국대병원에 바이러스를 전파한 환자도, 강동성심병원의 진료 중단을 초래한 사람도 의료진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 결과 수많은 후속 감염자와 격리자가 양산됐고, 대형병원의 진료가 중단됐다. 물론 그들이 의료진에게 처음부터 사실을 고백했다고 해도 제때, 적정한 진료를 못 받은 채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개인이 떠안아야 할 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해 다수에게 위험을 전가시킨 셈이다.

 격리자들 역시 외국 출장, 골프 여행, 강의, 대중교통 이용 등 다양한 행태로 격리장소를 이탈해 신고 건수가 하루에 25건을 기록하기도 했다.

 메르스에 관한 한 온 사회가 이기심을 집단적으로 극대화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의료 현장에서는 메르스 위험에 노출된 병원 방문 사실을 숨기는 환자와 가족, 격리 규칙을 무시하고 곧바로 병원을 찾는 격리자를 드물지 않게 접한다. 언론에 부각되지 않을 뿐이다.

 상황이 이러니 안심병원에서는 모든 환자를 대상으로 메르스 조회 시스템에 입력해 밀접 접촉자 가능성을 조회하고, 또다시 메르스 선별 문진표와 서약서를 작성시키는 등 2중, 3중의 감시망을 치고 있다. 의사-환자 간에 서로 믿고 의지해야 할 진료행위가 불신을 전제로 시작되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우리 사회를 지금처럼 불신과 이기심 바이러스가 만연한 곳으로 만든 것일까. 아마도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들로 사회 지도층 인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예로 고위 공직자 청문회만 눈여겨봐도 그들이 전 국민을 상대로 얼마나 쉽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잘하는지 알 수 있다. 지도층이 사익 추구로 내달리는 분위기에서 메르스 사태가 닥치자 방역 당국도, 병원도, 환자 자신도, 보호자도 마치 합심이라도 하듯 ‘쉬쉬’ 하며 별다른 부담감 없이 진실을 은폐했던 건 아닐까.

 사스, 신종 플루, 메르스의 출몰에서 보듯 신종 감염병은 머지않은 시간에 또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찾아와 대한민국을 위협할 것이다. 이때 아무리 의료 시스템과 의학 기술을 개선한다 한들 이것만으로는 감염병을 막기에 역부족이다. 이제부터라도 강한 공동체 의식을 가진 사회, 책임 있는 시민사회를 만드는 일에 나서야 한다. 그 일엔 물론 사회 지도층이 가장 앞장서야 할 것이다.

황세희
국립중앙의료원
소아청소년과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