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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2)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범이 윤희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다음은 윤희순이다. 그는 호를 범이라고 자신이 지었는데, 그의 아명 범이(호랑이)를 한문으로 쓴 것이다. 서울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한문공부를 많이 하여 우리나라 옛날 화가들과 그들의 화법에 대해서 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후 서울신문사 자치위원장으로 있을때 『조선미술사연구』라는 책을 냈는데 해방 후에 제일 먼저 나온 미술책이었다.
그는 김종태와 같이 경성사범학교를 나와 주교보통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성격이 김종태와는 정 반대였다. 근엄하고 착실해 까분다든지 건방지게 구는 일이 없고 학교에서도 평이 좋았다. 그대신 천재적인 섬광이랄까 번쩍이는 재질이 보이지 않았지만, 건실하고 믿음직한 곳이있어 신뢰감을 느끼게 하였다. 나이도 종태보다 훨씬 위여서 종태는 늘 그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두사람은 행인집에 자주 출입하였다. 그때 행인집은 옥인동에 있었는데 집이 크고 뜰도 넓었다.
안석주 김복진 김중현등이 날마다 이집 대청마루에 모여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여기에 김종태 윤희순 한 몫 끼어 행인집은 젊은 화가들의 사랑이자 화실노릇을 하였다.
이들은 모여 그림을 그리다가 저녁때가 되면 반드시 술집으로 향하였다. 모두들 술에 있어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친구들이었지만 윤희순은 술을 마시지 못하였다. 술을 한잔만 마셔도 오슬오슬 온몸이 떨려와 견딜수 없다는 것 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행인집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저녁때가 되었다. 출출해서 술집으로 향하는데 행인·종태·범이의 삼총사이외에 철마 김중현이 끼어 있었다. 철마는 묵노 이용우의 처남으로 서양화가였다. 종태가 앞장서 옥인동 근처 선술집에 들어가 몇잔씩 마신다음 그대로 헤어졌으면 좋을텐데 범이 이외에는 모두 주호라 그냥 떨어지기가 싫었다.
그러나 주머니에 돈이 없었다.
『형님 그 시계좀 빌려주-.』
마침내 그전부터 노리고 있던 범이의 금시계를 빌어 달라고 입을 열었다. 범이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미제「월삼」표 금딱지 회중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전당포에 잡히면 20원은 문제없이 받는다고 종태가 늘 침을 삼켜오던 터였다. 종태는 한번 말을 꺼내면 어떻게든지 성공하고야 말지 그냥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이것을 범이는 잘알고 있었다. 『꼭, 마셔야겠어?』
범이는 이것으로 반은 승낙한 셈이었다. 『많이도 안달래요. 5원만 달래서 우리 바에 가 한잔 먹고, 돈은 내가 책임지고 갚을테니까 걱정말아요.』
이렇게 종태는 선선히 말해놓고 범이가 주머니에서 꺼내는 금시계를 냉큼 받아가지고 전당포로 달려갔다.
말로는 5원밖에 안 달랜다고 했지만 얼마를 받았는지 종태는 전당표를 제 주머니속에 넣고 내놓지 않았다.
그날밤에는 넷이 바로 돌아다니면서 술을 실컷 마셨다. 범이는 술도 못 마시면서 끝까지 따라다녔다. 그 뒤 이야기로는 종태는 전당포에 들어가서 5원이 아니라 20원을 달래 주머니속에 넣고 흥청망청 다 마셔버리고 얼마뒤에 범이한테 전당표를 내밀면서『형님, 이거 미안해서 어떻하나. 너무 돈을 많이 썼으니』하더라는 것이다. 범이는 몇달을 걸려 돈을 모아 가지고 시계를 찾았다고 한다.
그래도 범이는 변함 없이 종태와 사귀어왔고, 종태가 평양에서 죽었을 때에도 제일 먼저 달려가 화장절차를 도맡아 처리해 왔다고 한다. <조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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