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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로 가는 그리스 구제금융 … 현금인출기로 가는 국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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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그리스 의회가 구제금융 협상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승인한 27일(현지시간) 그리스 테살로니키의 한 은행의 현금인출기 앞에 돈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테살로니키 AP=뉴시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의 운명이 파국을 향해 달리고 있다. 다음달 5일 구제금융안 수용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는 그리스에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연합(EU) 등 채권단이 구제금융 연장을 거부하면서다. 그리스의 국가 디폴트(채무불이행)와 그렉시트(Grexit·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우려도 더욱 고조되고 있다.

 그리스 의회는 28일(이하 현지시간) 알렉시스 치프라스(사진) 총리가 제안한 구제금융 수용에 대한 국민투표안을 승인했다. 지난 25일 채권단이 낸 최종협상안의 수용 여부를 국민투표에서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채권단은 연금과 임금 삭감 등을 통한 재정 지출 감축 등을 조건으로 그리스에 155억 유로 규모의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5개월 연장하는 협상안을 제시했지만 협상은 결렬됐다.

그러자 치프라스가 국민투표 카드를 꺼냈다. 치프라스는 27일 새벽 긴급 연설에서 “채권단이 그리스 민주주의와 국민에 최후통첩을 했지만 유럽의 기본 원칙과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국민투표를 선언했다.

 치프라스의 도박에 그리스의 디폴트 위험은 커졌다. 구제금융 프로그램 연장이 불가능해지면서 당장 30일 만기인 IMF 부채(15억4000만 유로)를 갚지 못하게 됐다. IMF 규정상 이는 ‘체납’에 해당돼 바로 디폴트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민간 채무 등을 감안하면 디폴트는 시간 문제일 뿐이다. 8월 말까지 그리스가 갚아야 할 빚만 87억 유로에 이른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는 “그리스가 30일까지 빚을 상환하지 못하면 빚을 갚을 때까지 어떤 자금 지원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게다가 유럽중앙은행(ECB)이 그리스 은행에 대한 긴급유동성 자금 지원을 중단하면 그리스 경제는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다. ECB의 돈 줄이 끊기면 자금 이탈을 막기 위한 은행 자산 동결과 자본 통제가 실시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스에서는 이미 뱅크런(예금 대량 인출 사태)이 시작됐다. 국민투표 실시가 발표되자 사람들이 돈을 찾기 위해 현금지급기(ATM) 앞으로 몰려들었다. 로이터에 따르면 그리스 전역에 있는 ATM 3분의 1 이상에서 현금이 바닥났고, 27일 하루에만 약 6억 유로의 현금이 인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파노스 카메노스 그리스 국방장관은 현지 TV에 출연해 “은행은 폐쇄되지 않을 것이고 ATM에도 현금이 공급될 것”이라며 사태의 진화에 나섰다.

 뉴욕타임스(NYT)는 “만약 은행이 무너지게 되면 새로운 통화를 도입할 수밖에 없는 만큼 결국 그리스는 유로존의 탈퇴라는 수순을 밟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국민투표에서 구제금융 반대가 더 많은 표를 얻으면 그렉시트는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실낱같은 희망은 있다.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현재 그리스 내 여론은 구제금융안 찬성 쪽이 우세하다. 그리스 일간 카티메리니는 27일 긴급 설문한 결과 찬성한다는 답변이 47.2%, 반대는 33%로 조사됐다고 보도했다. 라가르드 IMF 총재는 “국민투표에서 구제금융을 찬성하는 결론이 나오면 협상을 재개할 수 있다”고 여지를 뒀다. 유로그룹(유로존 재무장관 협의체)도 유로존의 안정을 위해 협상을 재개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혼란스런 그리스 정국이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국민투표가 찬성으로 결론나더라도 치프라스가 이끄는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은 실각하고 조기 총선을 치를 수밖에 없다. 구제금융 협상까지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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