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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193)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 (126)|도독시장|조용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그러나 괴뢰군이나 중공군의 행색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날 용기를 내서 종로 큰 길에 나가 보니까 두꺼운 솜옷 군복을 입은 중공군인듯 싶은 군대가 열댓명 떼를 지어 지나가는데 골목길로는 들어 올 생각을 안하는 것 같았다. 괴뢰군은 그림자도 없었다.
그런지 며칠 지나 대낮에 동네 큰집 대문을 뻐개는 소리가 들려 왔다. 몰래 숨어 나가 보니까 늙수그레한 사람 둘이서 리어카를 대문 앞에 대놓고 그 부자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큰 병풍을 서너개 가지고 나와 싣고 유유히 어디로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인사동에는 큰집들이 많은데 이런 집에서 고서·골동·서화병풍을 제것같이 이런 식으로 집어내갔다고 한다.
『조금 있다가 우리 구경가세. 이 시장 안에다가 옛날 책들과 서화·골동을 산같이 쌓아 놓고 헐값으로 막 판다네』
정재는 가게를 옆사람한테 맡기고 나를 데리고 나섰다. 얼마쯤 가니까 넓은 빈터 앞에 군데군데 옛날 책들이 산같이 쌓여 있고 항아리·술주전자 같은 백자·청자등 값진 물건이 길바닥에 죽 늘어 놓여 있었다.
그 옆으로는 작은 병풍·큰 병풍·사방 탁자·옛날 장롱들이 놓여 있었다. 도둑 시장이 크게 벌어진 것이다. 나는 기가 막힌채 뜻하지 않았던 이 도둑시장의 장관(?)을 바라보았다.
그뒤에도 나는 또 가보았지만 이 동대문시장 부근의 남북 청계천일대에는 책과 골동시장이 크게 벌어져있었다. 이 책들은 저울에 달아 팔기도 하고 심지어는 구루마에 실어 한 구루마에 얼마씩하고 팔기도 하였다.
육당이 우이동에 있는 책을 다 태워 버리고 또 새로 3만여권의 책을 모은 것은 순전히 이 청계천변에 벌어진 임시책방에서 산 것이었다. 육당은 나보다 약간 앞서서 환도하였는데 날마다 청계천 책방으로 돌아다니면서 근으로 달아 고서를 사들였다.
정재는 어느 곳에 가서 장사꾼과 수작을 걸었다.
『좋은 것 많소?』
『많구 말구요. 겸재·오원을 비롯해 완당 글씨, 대원군 난초, 무엇이든지 다 있읍니다. 헐값에 드릴테니 잘 골라 보세요』
손님이 없는 모양으로 우리를 보고 봉이나 잡은 듯이 달라 붙었다.
보기에 탐나는 겸재의 산수, 오원의 화조그림이 너저분하게 쌓여 있었다.
『대체 저것들이 어디서 나왔을까?』
『서울에 있는 좋은 서화·골동은 이제 아주 동났어. 샅샅이 다 뒤져 도둑질해 내 왔으니 앞으로는 좋은 서화를 구하려해도 없을꺼요.』
이렇게 걸으면서 또 한군데 오니까 남의 집 담에다가 현대화 여러 폭을 못으로 박아 걸어 놓고 팔고 있었다. 첫번째로 청전의 산수화가 눈에 띄었다.
『그거 좋다!』
내가 이렇게 말하니까 『좋구말구요. 제가 표구사에 있어서 그림을 많이 취급했는데 무어니 무어니해도 청전이 제일이죠. 그까짓 저기 있는 묵로나 정재한테 비합니까!』
그 자는 끝에 걸려 있는 묵로와 정재의 그림을 가리키면서 떠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 『묵로나 정재가 왜 어때서 그러시오! 두 사람이 다 우리나라에서 치는 일류화가가 아니오?』
그랬더니 그림장사는 펄쩍 뛰면서 『일류가 무슨 일류입니까. 술먹는데서는 일류일지라도 그림은 신통치 않아요. 술 처먹고 개차반 노릇 하는데서는 일류죠!』
나는 옆에 서 있는 정재 보기가 민망해 옆을 보니까 어느새 정재는 낌새를 챘는지 저쪽으로 도망치듯 달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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