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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22)이당 김은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이당은 타고난 성실과 근면으로 얼마 안가 동양화단의 중진이되었고 인물화로서는 당대 제1인가가 되었다. 그는 화가로서 드물게 보는 사교가여서 그 당시의 왕가 족적들과 귀족층, 그리고 부유층에 많은 친지를 가지고 있었다. 고희동·이도영중심의서화협회와도 잘 협조하여 협전에 매년 출품하였고, 총독부 미전에도 해마다 출품하였다.
그후 서화계의 파트롱으로 유명한 단자 이용문와 후원으로 동경유학의 길을 떠난 것이 1925년이었다. 일본화단의 대가인 소실취운과 결성소명의 지도를 받아 「제전」 에 입선하였고, 3년만에 귀국하였다가 다시 중국 북경으로 떠났다. 이 역시 이용문의 후원이었다.
동경과 북경에서 수련을 거치고 귀국한 김은호는 권농동 자택의 사랑을 개방하여 서화 애호가의 구락부로 만들었다.
권농동의 이 화실은 위창 오세창이「낙청헌」이라고 명명한 것인데, 청년후진들과 깊은 관계를 맺으란뜻이라고 하였다. 실업가·관리·서화 지망자들이 모여 사군자를 배우고 담소하고 놀았는데, 이당은 자주 놀러 오는 서화 애호가들과 의논하여 모임의 이름을 짓기로하고 이당의 「이」 자를 따서 「이묵회」라고 회이름을 지었다.
이묵회란 새 이름이 생기자 회원이 자꾸 늘어 이것이 은연중에 춘곡의 서화협회와 대립하는 서화단체가 되었다.
이묵회와 동시에 「후소회」도 생겼는데, 후소회란 이당의 젊은 제자들의 회합이었다. 낙청헌에는 젊은 그림학도가 많이 모여 이당에게 그림을 배웠는데 백윤문·김기창·장우성·이유태·조중현·한유동등이 중요한 멤버였다. 이들중 김기창·장우성·이유태는 지금은 당당한 내가가 되어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그때는 미미한 화학도였다.
이들이 동문전을 열고 싶다고 해서 우선 회명을 지어 달라고 스승 이당한데 청하였다. 낙청헌에는 이묵회회원 이외에 당대의 명사들도 많이 들렀는데 육당, 위당 정인보, 만해 한룡운, 고지 최린등이 자주 들렀다. 그래서 이당이 어느날 나온 위당한테 청해 지은 것이 후소회였다. 공자의 말에「회사후소」란 어구가 있어 거기서 딴 것이었다.
이 후소회의 이름을 가지고 1936년 가을 제1회 동문전을 개최하였다. 그때 신문에서는 후소회는 이당 김은호 화백의 문제중 이미 일가를 이룬 신진들의 화회로서 조선미술의 부흥을위하여 동문전을 개최한 것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이당의 사업으로 또하나 1936년에 동양화의 허백련·김은호, 서양화의 박광진, 조각의 김복진등 네사람이 중학동에다 조선미술원을 창설하고 1937년에 전화단을 망라한 성대한 낙성기념전을 개최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이당의업적은 이묵회를 조직하고 이묵회전을 개최하여 서화 애호가의폭을 넓펴 놓은 것과 후소회를 조직하고 많은 훌륭한 후배양성에 힘쓴 것, 두가지로 요약할수 있다.
그는 해방을 전후하여 화필이 무르녹아 춘향의 초상을 그리고이충무공의 영정도 그려 인물화의 최고봉임을 과시하였다.
세상에서는 그가 주초와 여색을 모르는 무풍류한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부산 피난중에 영도에있는 어느 요정에서 이당이『유산가』 를 비롯한 노랫가락과 유행가를 못하는 것 없이 부르는 것과 옛날 이야기를 어떻게 구수하게 잘하는지 모두들 혀를 차고 탄복하는 것을 보았다. 이당 혼자서 온밤을 노래와 이야기로새우고 새벽녘에야 헤어졌는데, 이당이 작고하기 얼마전 종로에있는 태을다방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깔깔 웃은 것이 그와만난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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