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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월드컵] 모처럼 웃었다, 고마워 태극낭자 23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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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여자축구 대표팀이 스페인을 꺾고 캐나다 여자월드컵 16강에 올랐다. 다음 상대는 지난 2003년 미국 월드컵에서 0-1 패배를 안긴 유럽의 강호 프랑스다. 미드필더 조소현(왼쪽)이 후반 8분 동점골을 터뜨린 후 동료 권하늘과 환호하고 있다. [오타와 AP=뉴시스]

18일(한국시간) 캐나다 오타와 랜즈다운 경기장. 추가시간이 주어진 후반 48분. 스페인이 아크 정면에서 프리킥을 얻었다. 골키퍼 김정미(31·현대제철)의 얼굴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난 14일 코스타리카전에서 마지막 1분을 남기고 동점골을 허용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스페인 선수가 찬 공은 골키퍼 김정미가 손을 뻗은 바로 위, 크로스바를 맞고 퉁겨나갔다. 그리고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한국이 여자월드컵에서 사상 첫 승과 함께 16강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스페인을 2-1로 꺾은 한국은 캐나다 여자월드컵 E조 2위(1승1무1패)로 16강에 진출했다.

 2003년 미국 월드컵에서 조별리그 3전 전패로 탈락했던 한국은 12년 만에 출전한 두 번째 월드컵에서 첫 승과 16강을 동시에 달성했다. 남자는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첫 출전한 이후 48년 만인 2002 한·일 월드컵(폴란드전)에서 첫 승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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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덕여(54) 감독은 “내 인생에서 가장 뜻깊은 경기였다. 선수들이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데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선수들은 16강을 확정지은 뒤 펑펑 울었다. 김정미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지만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울 것 같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 뒤를 지나가던 김범수 골키퍼코치는 빨개진 눈으로 김정미에게 ‘수고했다’는 눈인사를 했다.

맏언니 김정미의 마지막 위기 순간. 종료 직전 스페인의 프리킥이 골대를 맞았다. [AP=뉴시스]

 김정미는 월드컵에 두 번째 출전한 대표팀 최고참이다. 지난 2003년 열아홉 살에 대표팀에 발탁된 후 그는 12년 동안 한국의 골문을 지켰다. A매치 9경기만 치르고 나선 미국 월드컵에선 조별리그 3경기동안 11골이나 먹었다. 또다시 월드컵이란 기회가 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한국은 2007년, 2011년 월드컵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고 김정미도 점점 나이를 먹었다. 골키퍼는 30대가 되면서 순발력이 떨어지고 행동 반경이 좁아진다. 골키퍼는 열악한 한국 여자축구에서도 가장 열악한 포지션이었다. 그의 뒤를 이을 후배가 없어 두 번째 월드컵 출전 기회를 얻었다. 이번엔 정말 잘하고 싶었다. 새벽에 개인 훈련을 하고, 오전과 오후에는 팀 훈련을 소화하면서 하루에 5~6시간 땀을 흘렸다. 김 코치와 함께 프리킥 실점, 크로스 연결에 이은 실점, 코너킥에서의 실점 등 수백 가지 상황을 세세하게 나눠 자동적으로 몸이 반응하도록 훈련했다.

 하지만 김정미는 이번 대회 조별리그 세이브율 44.4%로 골키퍼 30명 중 26위다. 실점할 때마다 자기 책임인 것 같았고, 잠도 잘 오지 않았다. 그 때 힘을 준 건 월드컵에 처음 나왔는데도 떨지 않고 씩씩하게 뛰는 동생들이었다. 김정미는 “보여준 게 없어서 참 속상했다. 그런데 동생들이 힘내서 열심히 뛰고 득점도 해주니 힘이 났다”고 말했다.

국민을 위로하다 … 여자축구, 첫 월드컵 16강 태극 낭자들이 메르스에 지친 우리 국민에게 힘을 줬다. 여자축구 대표팀이 캐나다 여자월드컵 본선에서 월드컵 첫 승과 16강 진출을 동시에 이뤘다. 한국은 18일(한국시간)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린 E조 최종전에서 스페인에 2-1 역전승을 거두며 조 2위(1승1무1패)로 결선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결승골을 넣은 김수연(오른쪽 넷째)은 “우리를 보며 국민들이 메르스를 극복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16강 확정 후 선수들 이 환호하고 있다. [사진 대한축구협회]

 김정미는 스페인전에서 혹독한 훈련의 결과를 보여줬다. 전반 29분 베로니카 보케테에게 선취골을 내줬지만, 전반 32분 나탈리아 파블로스의 강력한 슈팅을 쳐냈다. 목청이 터져라 “앞으로 가” “옆에 비었잖아”라고 소리를 질렀다.

 당당해진 맏언니 모습에 동생들도 골 행진을 시작했다. 후반 9분 강유미(24·KSPO)가 오른쪽에서 크로스를 올리자 조소현(27·현대제철)이 솟구쳐 올라 헤딩 동점골을 터뜨렸다. 김정미는 후반 19분 결정적 슈팅을 막아내 역전 발판을 마련했다. 교체로 들어간 김수연(26·화천 KSPO)이 후반 33분 오른쪽 측면에서 길게 크로스를 올렸다. 유영아(27·현대제철)를 보고 올린 크로스였는데 공이 스페인 골키퍼의 머리를 넘어가면서 그대로 골문으로 빨려들었다. 2-1 역전. 김정미의 얼굴도 활짝 펴졌다.

 윤 감독은 “김정미는 월드컵을 경험한 베테랑이자 대표팀 맏언니로서 역할을 잘 해주고 있다”면서 “남은 경기에서는 앞으로 나와서 자신있게 볼처리를 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타와=박소영 기자 psy091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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