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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백년」서울·대구서 세미나|"정변성공했더라도 일본이 깼을 것"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4∼6일은 갑신정변이 일어난지 꼭 1백년이 되는 날이다. 국운이 기울어가던 한말, 국가개조의 혁명적 의지를 품은 김옥균등 개화파세력이 쿠데타를 단행,「3일천하」로 끝난 사건이다. 이날을 맞아 서울과 대구에선 동시에 이를 기념하는 학술모임이 열렸다.

<갑신정변을 보는 시각>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소장 오세창)가 주최, 4일 대구 동대학에서 열린 기념학술회의에서 강동진교수(일본축파대)는 갑신정변을 일본의 명치유신과 단순비교하는데 따른 위험성을 지적했다. 그는 아시아 부르좌혁명의 일반성과 특수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명치유신의 성공과 갑신정변의 실패」를 내적발전의 후진성에서 찾는다면 일본학계에 풍미하는「명치유신찬양론」을 뒷받침 해주는 결과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일본학자들은 일본만이 독립을 유지, 근대자본주의국가로 나간 것은 한·중보다 우월한 역사단계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변혁의 주체없어>
강교수는 갑신정변이 명치유신과 다른 점으로 우선 변혁의 주체를 길러내지 못한점을 들었다. 일본은 개항이후 명치유신까지 15년의 긴세월동안 변혁주체가 살아난 반면 우리에겐 이들을 궤멸시킬 외군, 즉 청·일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영·미등 열강이 청에서 겪은 대평천국난토벌등 고생스러웠던 경험이 일본을 살려준 면도 있다. 열강은 일본내에 적당한 세력을 길러 간접지배를 꾀하려 했다. 일본은 청·일, 러·일양전쟁에서 전쟁비의 절반을 영·미시장에서 조달하는등 영·미에 대한 종속성이 농후했다.

<일과결탁은 우연>
반면 조선은 새로운 모순을 안고있는 일본으로부터 개항됐다. 일본은 영·미로부터 받는 외압의 두배의 외압으로 우리에게 밀어닥친 것이다. 외압의 종류가 다른데다 다른 외압들이 이를 원하고 있었다.
강교수는 당시 일본이 당면한 목표는 조선의 무역주도권과 금을 뺏는 일이었으며, 그들이 개화파를 도왔다는 것은 우연히도 그들과 연결됐을 뿐이지 도운게 아니라고 지적했다.
강교수는 만약 갑신정변이 성공했다면 일본은 이를 깨부수려 덤벼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사학에서의 갑신정변>
5일 한국정치외교사학회(회장 신복룡)가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연 기념학술회의에서 신복룡교수(건국대)는『북한사학은 갑신정변을 부르좌혁명으로 본다』고 소개했다. 부르좌혁명에 대한 선호라기보다 이단계가 생략되면 그들의 역사발전이론에 단절이 오기 때문이라는 것.
신교수는 그들이 갑신정변에서 봉건체제를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나 부르좌의 개념, 경제사적 시대구분에 이견을 보이고 있어 갑신정변에 대한 남북한의 이견은 매우 폭이 넓다고 지적했다.

<민족투쟁사로 봐>
북한사학은 또 갑신정변을 한국의 민족투쟁사, 즉 민족주의 운동사의 계보에 포함시키고 있다. 신교수는 민족보전과 근대화, 민중적 지지기반등을 고려할 때 갑신정변에 민족주의적 요소가 내포돼 있는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민족운동사의 계보에 포함시기는데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영웅사관과 민중사관의 문제. 북한사학은 갑신정변을 이 두가지 사관에서 함께 보려함으로써 괴로움을 겪고있다. 민중사관이 노동자·농민을 혁명의 주역으로 보려는 마르크스적 사관에 충실하려는 의지의 표현인 반면 김옥균을 영웅시 하는 것은 김일성의 성인화 과정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 신교수는 북한사학이 현대사학의 기본조류인 민중사관으로 회귀하기엔 상당히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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