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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게아 - 롱고롱고의 노래 <9> 세상 어디에도 없는 세상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일러스트=임수연

거인을 따라 들어간 피라미드엔 아빠의 모습이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여러 세상을 보아왔지만, 이런 세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세계적인 SF 작가의 책에서도 이런 세상은 없었다. 인류의 상상력과 과학기술의 조합은 먼 과거를 가거나 먼 미래를 가는 것이 전부였다. 마루는 엉거주춤 뗏목에서 내리며 감탄을 토해냈다.

“맙소사.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어. 와! 와!”

“와! 내 세상이다! 이제야 내가 차별받지 않는 세상으로 온 거야. 난 더는 뚱뚱하지도 거대하지도 않아. 난 지금부터 정상이야. 아, 행복해!”

골리 선생님은 미친 듯이 웃었고 배짱과 허세의 말솜씨를 가진 처세의 달인 수리도 흥분하고 있었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공룡과 외계생명체들. 도대체 이런 조화가 어떻게 가능한 거야? 게다가 땅의 시대가 아니라 물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까지. 이건 고고학적으로 아니 역사학적으로 아니 진화인류학적으로 전혀 뜻밖이야. 이건, 이건…난 행복해. 행복해!”

“수리야, 네가 말하는 외계생명체들도 엄청 커. 거인이야!”

사비가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그렇구나. 3m는 될 것 같아. 거인들이야. 우리가 실존했다고 믿는 거인들의 키가 180cm 정도였다고 했는데 더 크네.”

수리도 놀란 토끼 눈이 됐다. 마루가 사비의 팔을 막 흔들었다.

“저거 저거. 봐봐.”

돌아보니 브라키오사우루스가 있었다. 사비가 킥킥 웃었다. 골리 선생님이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몸통을 살살 쓰다듬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브라키오사우루스는 그럴 때마다 ‘워우 워우’ 기쁜 듯 소리를 내질렀다. 행복한 풍경이었다.

“우아악~”

갑자기 마루가 기겁을 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벨로키랍토르가 아이들에게 돌진한 탓이다. 벨로키랍토르는 몸통에 용수철 엔진이라도 달렸는지 펄쩍펄쩍 나르듯 탁탁 튀었다. 아이들은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자리에 얼어 붙었다. 벨로키랍토르가 누런 이빨을 우악스럽게 드러내며 마루를 집어삼킬 듯 덮쳤다. 벨로키랍토르의 아가리가 크게 벌어지며 마루의 머리통을 삼키려는 순간, 마루는 죽음을 예감하며 눈을 감았다. 수리와 사비도 덩달아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쿵쿵 쿵쿵 팍팍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수리가 슬며시 눈을 떴다. 분명히 마루가 벨로키랍토르에게 잡아먹혔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 마루야?”

마루는 눈을 감은 채 돌처럼 굳어 있었다.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벨로키랍토르는 저만치 던져진 채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수리가 마루를 툭 건드렸다.

“넌 아직 살아있거든? 죽었다고 착각하지 마.”

그제서야 마루가 눈을 떴다. 아주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윽! 이건 또 뭐야?”

마루는 다시 눈을 힘껏 감았다. 눈앞에 벨로키랍토르를 날려보낸 거인의 큰 얼굴이 떡 버티고 있었다. 마루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살짝 떴다.

“하하. 아저씨. 변종 ET? 우리가 알던 ET 모습이 아닌대요? 그 머리통은 작고 눈알은 크고 팔 다리는 가늘고, 알죠? 하하…하하.”

마루는 어색하게 굳어 있었다. 인형 입처럼 입술만 달싹거렸다.

“내가 꿈에서 보았었고, 우리가 거울의 방에서 보았고, 그래서 그래서… 바로 그 붉은 머리의 거인이야. 모두 현실로 드러나다니.”

수리는 붉은 머리 거인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얼굴이 진짜 크다. 몸의 절반이 얼굴이야. 정확히 반으로 접혀지는 폴더 같아. 호호, 미안해요.”

사비도 겁내지 않았다. 혀를 날름 내밀었다.

“환영한다.”

붉은 머리 거인의 음성은 매우 부드럽고 매우 다정했지만 기계음처럼 들렸다. 붉은 머리 거인의 큰 머리통은 말을 하거나 고개를 돌릴 때마다 투명하게 바뀌었으며 그럴 때마다 우주의 회오리 은하가 드러났다.

파파팍 하는 소리와 함께 물컹한 물속에서 폭죽이 하늘로 치솟았다.

“뭐지? 뭐야? 폭죽이야?”

아이들이 발을 딛고 있는 물컹한 물속에서 수만 마리의 물고기들이 힘차게 치솟았다. 물뱀 같기도 했고 장어 같기도 했다. 백색의 기다랗고 가는 물고기들은 펄떡펄떡 치솟으면서 몸을 휙휙 회오리처럼 틀었다.

“이건 올름이야. 올름!”

수리가 이제는 비명을 질러댔다.

“올름은 땅의 진동을 느끼고 미래를 예언하는 전설의 물고기라고. 올름이야, 올름.”

올름은 장님 물고기였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몸속에 감춰진 예민한 귀로 아주 아주 먼 곳의 아주 아주 깊은 곳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견할 수 있는 점쟁이 물고기였다.

“너희를 환영하는 거야.”

붉은 머리 거인은 아이들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수리가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누구나 이름은 있잖아요?”

“이름? 이름은 중요하지 않아. 우리는 모두 거대한 우주의 먼지일 뿐이거든.”

사비가 손뼉을 쳤다.

“폴더요. 폴더.”

“폴더? 폴더.”

붉은 머리 거인도 웃으며 따라 했다. 폴더는 앞서 걸었다. 물은 깊지 않았고 물컹했다.

“물이 생명체를 보호하고 있어. 마치 엄마 뱃속의 양수가 아기를 보호하듯 말이야. 3.5%의 소금과 미량의 금속을 포함한 지구의 바닷물이 아니야.”

수리는 새로 만난 세상에 푹 빠져들고 있었다.

미지의 세계에 건설된 피라미드 속으로

윙윙 탁탁 윙윙 탁탁. 피라미드는 이렇게 소리를 내며 문을 열어주었다. 피라미드 건축물의 절반은 물에 잠겨 있었다. 그러니까 물속의 집인 셈이다. 수리가 제일 먼저 발을 디뎠다.

“달에 첫발을 디딘 닐 암스트롱이라도 된 기분이야.”

피라미드 내부는 완전히 새로운 또 하나의 행성이었다. 바닥에는 풀이 가득했고 푹신했다. 날씨는 따뜻하고 쾌적했다. 키가 20m에 달하는 수백 그루의 파라 고무나무(Para Rubber Tree)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먼 꼭대기에서는 세 개의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저마다 다른 우주의 모습을 머리통에 담고 있는 붉은 머리의 거인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저것 봐. 안드로메다야. 저건 베가성… 저건 독수리 성운….”

수리는 정신없이 말을 쏟아냈다.

“거인들은 인간을 얼마든지 잡아먹을 수 있어. 지금까지 거인들은 그래왔어. 악당의 대표였다고. 너무 좋아하지 마라.”

마루는 붉은 머리 거인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와와” “와와” 어디선가 거친 함성이 들려왔다. 기계음이 아니었다.

“앗, 이 소리는 인간의 목소리야.”

수리가 두리번거렸다. 피라미드의 바닥이 어느새 투명 유리창으로 바뀌어 있었다. 저 아래 쪽에 인간들이 노예선의 노예처럼 묶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수리가 폴더에게 물었다.

“폴더, 왜 이들을 묶어 놓았죠? 어서 말해 주세요.”

폴더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음성은 변함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저들은 우리가 떠나온 별에서 데려왔다. 저들은 노예다. 황금을 캐고 있었다.”

“황금을 캐서 먹는 거예요?”

마루는 배가 고팠다.

으아악 하고 아래쪽에서 거친 소리가 점점 커졌다. 인간들이 묶인 채 서로 싸우고 있었다. 수리와 사비, 마루는 불안해졌다.

“어떻게 해주세요. 다치거나 죽겠어요.”

사비가 외쳤다. 폴더는 침착했다.

“늘 황금을 두고 싸우지.”

“모두 소중한 생명체예요. 살아있는 생명체요.”

수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폴더는 고개를 크게 갸우뚱했다.

“생명체는 아니야. 저들은 황금을 캐는 용도로만 만들었어.”

“당신들은 신이라는 거에요?”

수리는 지지 않고 대들었다. 그때 사비가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아빠다.”

사비의 말에 수리도 인간들의 싸움 속에 엉켜 있는 아빠를 찾아냈다.

“아, 저기 저기, 아빠가 있어. 아빠야. 어, 어. 안돼!”

수많은 케아라닥틸루스가 기다란 주둥이 안에 숨겨진 촘촘한 톱이빨로 인간들을 낚아채고 있었다.

“다 죽겠어요. 아빠, 아빠!!”

수리가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그러나 폴더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죽으면 또 만들면 된다.”

폴더의 말에 수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신들은 정말 나쁜…거인들이군요. 마루의 말이 맞았어요. 내 친구가 옳았다고요.”

수리는 겁도 없었고 오히려 당당한 모습이었다.

“전 아빠를 찾으러 이곳까지 왔어요. 내 스스로 왔어요. 쉽게 당하지 않을 거에요.”

폴더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의 머리통 속에 비치는 회오리 은하가 수없이 깜빡거렸다.

“무엇을 보고 왔지?”

“꿈이요. 꿈에서 거인 석상을 보았어요. 또 거인들이 노래하는 것을 보았어요.”

“그리고?”

“학교에서 그 노래를 들었어요, 꿈속에서 거인들이 불렀던 노래를 다시 들었죠.”

“그리고?”

“노란 집이요, 노란 집으로 들어가서. 그래요, 그 이상한 암호를 보았어요. 암호 태블릿!”

“그리고?”

“거울의 방으로 들어갔어요. 거울의 방에서 다시 거인 석상을 만났어요. 붉은 머리의 거인 석상이었어요.”

“또 누구를 만나지 않았어?”

“네. 금발 머리의 까만 소년이요.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암호를 말했어요.”

“넌 스스로 오지 않았어.”

거인의 말에 수리가 깜짝 놀랐다.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우리는 이스터 섬으로 떠났다.

52. 09. 42. 532. N

13. 13. 12. 69. W.

360. 72. 30. 12. 25920.”

“아빠가 보낸 메시지가 아니었어.”

하지윤은 시인·소설가. 판게아 시리즈 1권 『시발바를 찾아서』, 2권 『마추픽추의 비밀』, 3권 『플래닛 아틀란티스』를 썼다. 소년중앙에 연재하는 ‘롱고롱고의 노래’는 판게아 4번째 시리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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