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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노조, 존재감을 보여줄 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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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표재용
산업부장

10여 년 전 미국 출장길에 뉴욕의 작은 아버지 집에 들른 적이 있다. 식사 자리에서 캔맥주를 건네던 그가 문뜩 이런 질문을 던졌다. “기업을 취재한다니까 물어보마. 미국에 양산차를 수출하는 곳이 몇 나라쯤 되겠냐?”잠시 머뭇거리자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고작 네댓 나라뿐이다.” ‘설마요’라고 말할 뻔했지만 사실이었다. 미국차업계의 생산기지 격인 캐나다·멕시코를 빼면 일본·독일, 그리고 한국 정도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유럽의 자동차 맹주인 독일(66만 대)도 미국시장에선 한국(75만 대)의 뒷줄에 서있다. 자동차 종주국이자 해마다 1000억 달러 이상 차를 수입하는 미국에 연간 수십만대 이상 차를 파는 나라는 이처럼 세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이런 저력의 주인공인 현대기아차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위기에 몰렸다.

 국내에선 수입차 공세로, 해외시장은 원화 강세 탓에 모두 죽을 쓰고 있다. 탈출구는 대중차 이미지를 뛰어넘어 벤츠와 BMW,도요타의 렉서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프리미엄(명품) 브랜드로의 도약이다.

 현대차가 지향하는 최종 목적지도 바로 그 곳일 것이다. 현대차 입장에선 그건 일본·독일차를 따라잡고 얼마 전부터 본격 수출에 뛰어든 중국 같은 후발주자를 따돌리려면 무조건 진입해야 하는 일방통행로이기도 하다. 명품의 후광은 눈부시다. 브랜드 가치와 제품 가격이 치솟는 건 기본이다. 한번 소비자들의 사랑이 꽂히면 웬만해선 흔들리지 않는다. 한데 유감스럽게도 현대차의 도전에 박수 못지않게 걱정과 우려의 시선도 만만치않다. 프리미엄은 단순히 제품만이 아니라 회사 이미지와 임직원의 평판까지 함께 파는 일이어서다.

 독일 명차들이 틈만 나면 생산라인에서 맹활약하는‘마이스터(거장)’들을 홍보하고 일본 렉서스가 ‘모노즈쿠리(장인 정신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명품을 내놓는다)’를 구호처럼 외치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그럼 지난 27년간 23차례나 전쟁 같은 노사분규를 치렀지만 여전히 노사가 여전히 앙숙처럼 으르렁대는 현대차에 대한 인상은 어떨까. 사실 그 어떤 글로벌 제조사와도 당당히 견줄만한 출중한 장인과 엔지니어들이 넘쳐나는 곳이 현대차다. 대다수 소비자들은 그러나 툭하면 조업 중단 스위치를 움켜쥐고 회사를 겁박하는 붉은 노조 조끼를 먼저 떠올린다. 올해도 어김없이 연례 행사처럼 시작된 현대차의 노사 공방을 지켜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소비자들은 늘고만 있다. 그리고 이중 상당수는 수입차 매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 결과 현대차엔 프리미엄 진입은 커녕 양산차 시장에서도 수입차에 안방을 모두 내줄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현대차 노조 역시 그저 그런 이익단체로만 비친다.

 회사가 코너에 몰린 만큼 이쯤 해서 노조가 나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사측의 허를 찌를 때가 아닐까 한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듯싶다. 게다가 조금만 신경 쓰면 회사의 평판과 노조의 이미지를 단박에 바꿀 수 있는 것들이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현대차 미국(14.7)공장은 물론 중국(17.7), 심지어 인도(20.7) 보다도 뒤진 국내 공장의 HPV(26.8, 차 한대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를 조금만 앞당겨보자.

 또 잘 팔리는 차가 있으면 자발적으로 라인에 인력을 추가 투입해 사측을 거듭 머쓱하게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한다. 최근 물량이 달리는 신형 투싼을 울산2공장에서 공동생산하기로 노사가 합의한 것처럼 말이다.

 국내외 생산총량 결정시 노조의 사전 허가 같은 유례없는 임단협 요구 사안은 품위를 생각해 빼는 것도 아이디어다. 이참에 현대차 울산 공장의 장인들이 자기 이름을 걸고 세계 최고의 스포츠카를 만드는 프로젝트에 도전해볼 만하다. 이 모든건 노조가 주도권을 장악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측도 비용 절감에 매달리거나 노조에 윽박만 지르지 말고 숨어있는 명장들을 발굴하고 그들이 회사의 자랑이 되는 여건을 만들어주자. 프리미엄 브랜드는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싹이 튼다. 그게 되면 환율이 출렁여도 떨지 않고 국내 생산 라인도 온전히 지킬 수 있다. 회사와 노조가 사는 길이기도 하다.

 바라건데, 이런 변신으로 그간 현대차 노조만 언급하면 ‘집단 이기주의의 끝판왕’ ‘귀족 노조’라고 빈정대온 경제단체들과 언론에 보기좋게 한방 먹여주길 고대한다.

표재용 산업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