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분간 과거사 맴맴 … 국방 현안은 평행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2면

한민구 국방부 장관의 공식 일정은 지난 3일간 19개였다. 지난달 29일부터 사흘간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4차 아시아안보대화에서다.

 그는 식사시간을 제외하곤 15~30분 단위로 시간표를 쪼개 움직였다. 하지만 공을 들여 준비한 건 일본과의 양자회담이었다. 특히 지난달 30일 나카타니 겐(中谷元) 일본 방위상과의 한·일 국방장관회담은 4년4개월 만에, 박근혜 정부 들어 처음 열린 회담이었다.

  나카타니 방위상은 “유사시 일본 자위대를 파견하려면 해당 국가의 사전 동의가 국제적 관례다. 한국도 여기에 해당한다”는 점을 확인했다. 한국은 13년 만에 일본 해군이 주관하는 요코스카(橫須賀) 관함식(함정들을 함께 기동하고 내부를 공개하는 행사)에 해군 함정을 파견하기로 했다. 한국 함정이 일본 관함식에 참여하는 건 13년 만이다. 그러나 형식적인 교류 합의 외에 국방협력의 핵심 분야에 대해선 평행선을 달렸다. 국방부 관계자가 전한 회담 내용이다.

 ▶나카타니=“양국 간 정보보호협정이나 군사지원협정을 체결하자.”

 ▶한 장관=“여건이 충분히 조성돼야 한다. 북한은 대한민국 영토다. 자위대의 북한에 대한 군사적 행동에도 한국과의 사전 협의, 한국의 동의가 필요하다.”

 ▶나카타니=“지금 이 자리에서 대답하기 어렵다. 추후 논의하자. 한·일 국방장관 회담을 또 하자.”

 ▶한 장관=“신중히 검토해 보겠다.”

 두 사람은 예정시간(30분)의 두 배 가까운 57분간 협의했지만 알맹이가 없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양국 국방장관 회담의 발목을 잡은 것은 결국 ‘과거사’였다.

 한 장관은 회담에서 “한국과 일본은 국방교류와 협력을 위한 시스템은 잘 구축돼 있지만 가동이 안 되는 건 역사 문제”라며 “역사를 직시하고 양국 관계가 미래로 나갈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으나 나카타니 방위상은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고 한다.

 국방부 당국자도 “안보와 역사 문제를 분리 대응하는 차원에서 한·일 장관회담을 했으나 역사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반성이 없는 상황에선 신뢰가 생길 수 없기 때문에 군 고위급 교류나 전투와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사안에 대해선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과거사 문제로 인해 반(半)보 전진하는 데 그쳤다”고 덧붙였다.

 이날 나카타니 방위상은 한 장관과의 회담 전 애슈턴 카터 미 국방장관과 만나 “지난번 방문(4월) 때 (한·일 국방장관회담을) 주선해줘 감사하다”고 말했다. 한국이 미국의 요청에 의해 떠밀려 회담장에 나선 것이란 뉘앙스의 발언이었다. 한 장관은 “우리 측의 판단에 따라 회담을 수용한 것이고, 미국으로부터 어떠한 얘기를 들은 게 없다”고 일축했다.

 이번 회담이 일본 측의 요구로 성사됐음에도 나카타니 방위상은 회담장에 7분이나 늦게 나타나 한 장관 등을 복도에서 기다리게 했다. 하지만 사과나 유감표시는 없었다. 국방부 당국자는 “다른 일정이 늦게 끝났을 수도 있지만 외교적인 결례”라고 지적했다.  

싱가포르=정용수 기자 nkys@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