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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기와 SNS, 베블렌 효과를 몰아내다

중앙일보

입력

1909년 프랑스 파리 캉봉가.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1883~1971)의 모자 가게 ‘샤넬 모드’가 문을 열었다. 샤넬의 이름이 패션사에 등장하는 순간이다. 귀부인의 모자에 장식을 다는 디자이너로 명성을 얻은 샤넬은 1913년 바닷가 휴양도시 도빌에 첫 부티크를 냈다. 남성 속옷에 사용되던 저지 천으로 여성의 옷을 만들어 주목받으며 ‘샤넬’이라는 이름을 알렸다. 그 여세를 몰아 1918년 캉봉가에 재입성한 뒤 상류사회 패션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이후 샤넬은 의류와 화장품ㆍ액세서리ㆍ시계ㆍ보석ㆍ가방 등을 아우르는 브랜드가 됐다.

프랑스 명품의 대명사인 샤넬은 시간을 초월한 가치를 자랑한다. 여성복과 남성복의 경계를 허물고 실루엣과 라인에 초점을 맞춘 ‘샤넬룩’은 100년이 지난 현재도 진행형이다. 21년 출시한 향수 ‘N°5(넘버 5)’는 전 세계에서 30초에 한 개씩 팔린다. 55년 2월에 내놓은 금색 체인이 달린 퀼팅 숄더백 ‘2.55백’은 여전히 샤넬의 스테디셀러다.

이런 샤넬의 명성을 지켜온 원동력 중의 하나가 고가(高價)전략이다. 샤넬은 ‘노 세일 전략’을 고수하며 이미지를 관리해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명품 브랜드의 가격은 자부심의 주 원천인 만큼 시간이 지나도 제품의 가치가 유지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가격을 올려왔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수요는 줄지 않았다. 가격이 비쌀수록 수요가 늘어나는 ‘베블렌 효과’다. 미국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렌(1857~1929)이 『유한계급론』에서 지적한 ‘과시적 소비’탓이다. 과거처럼 확실한 신분제도가 없는 현대 사회에서 재력과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해 소비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명품업체는 ‘그들만의 리그’를 위한 문턱을 만들기 위해 고가전략을 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2002년에서 2012년까지 7개 명품백 업체의 가격 추이를 분석한 결과 매년 평균 14% 올랐다. 연간 물가 상승률(2.5%)를 훨씬 웃돌았다. 마리오 오르텔리 번스타인 애널리스트는 FT와의 인터뷰에서 “환율 변동을 감안해 가격을 올리는 것은 괜찮다. 소비자들은 가격 인상 전에 제품을 구매했다는 사실에 안도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격을 내리면 바가지를 썼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특히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에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비싼 값을 책정했다. 명품 시장에서는 ‘일물일가(一物一價) 법칙’이 유명무실하다. 명품업체가 지역별 가격차를 용인해서다. 아시아 지역이 ‘호구’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다. 그럼에도 샤넬은 “최고 수준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격을 조정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고가 정책으로 인해 시중에는 ‘샤테크(샤넬백+재테크)’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가격인하를 한 번도 한 적 없는 샤넬 정품을 사서 쓰다 중고로 팔아도 짭짤한 수익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 밖의 일이 벌어졌다. 지난 3월 샤넬이 가격을 내려서다. 베블렌 효과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한국·중국ㆍ홍콩 등에서 제품의 가격을 21% 낮췄다. 반면에 유럽에서의 가격은 올렸다.‘가격 평준화 정책’이다. 지역별로 천차만별이던 가격을 엇비슷하게 맞춘 것이다. WSJ에 따르면 샤넬 11.12백(미디엄)의 경우 중국에서 6155달러(3만8200위안)이던 판매가를 4834달러(3만 위안)로 낮췄다. 유럽의 판매가는 3874달러(3550유로)에서 4649달러(4260유로)로 높였다. 미국의 판매가(4900 달러)는 그대로 유지했다. 샤넬은 “앞으로 전 세계적으로 제품의 가격 차가 10% 이상 나지 않도록 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샤넬 쇼크’다.

뿐만 아니다. 다른 브랜드도 가격 낮추기에 나섰다. 구찌는 28일 중국에서 일부 품목의 가격을 최대 50%까지 내렸다. 버버리도 20일(현지시간) 중국과 홍콩에서 가격을 낮췄고, 유럽에서 가격을 올리는 가격 평준화 정책을 도입했다. 스위스의 명품 시계업체인 파텍 필립스와 태그 호이어도 중국과 홍콩 등에서 가격을 내렸다.

콧대 높던 명품업체가 가격을 낮춘 이유는 뭘까. 일물일가 원칙에 맞게 전세계에서 유통되는 제품의 가격을 엇비슷하게 맞추는 전략을 펴는 이유는 뭘까. 여기에는 두 가지 비밀이 있다. 첫 번째가 유럽중앙은행(ECB)의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인 양적완화(QE)다. 샤넬 쇼크’가 벌어지기 전인 지난 3월 초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돈의 수도꼭지를 열었다. 국채 매입을 통해 매달 600억 유로씩 시장에 풀었다. 시중에 막대한 자금이 쏟아졌다. 돈이 흘러 넘치며 유로화 가치는 미끄러졌다.

유로화는 지난해 5월부터 이달 27일까지 달러 대비 22.6%나 떨어졌다. 그 결과 ‘1달러=1유로’의 패리티 시대도 눈 앞에 다가왔다. 이게 뜻밖에 명품 업계에 충격파를 던졌다. 유로화 가치가 떨어지자 유럽 지역에서 판매되는 명품의 가격이 아시아 주요 국가의 돈으로 환산했을 때 크게 싸진 것이다. 예컨대 2011년 5월에 4000유로짜리 가방을 살 때는 원화로 643만2000원이 들었다(1유로=1608원). 하지만 28일에 이 가방을 사면 482만8000원이면 된다(1유로=1207원). 160만4000원이나 싸졌다.

당연히 환차익을 노린 ‘회색시장’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중국ㆍ홍콩ㆍ한국 등의 소비자가 유럽으로 여행가서 가방을 사온 뒤 자국 내 온라인 쇼핑몰 등에서 되팔면 비행깃삯 등 각종 비용을 제하고도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번스타인 리서치에 따르면 아시아에서 가장 큰 시장인 중국의 소비자가 프랑스 파리에서 명품 브랜드 제품을 사면 자국보다 39% 싼 가격에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가방과 시계ㆍ보석 등 명품 브랜드의 유럽과 중국 가격 격차가 3년 만에 최대치로 벌어졌다”고 보도했다.

여기에 스마트폰 보급과 SNS(사회관계망서비스) 확산 등 정보통신 기술이 발전하면서 실시간으로 전세계의 가격을 비교할 수 있게 됐다. 원정 쇼핑이 늘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비상이 걸린 곳은 명품업체의 아시아 현지 매장이다, 회색시장이 활기를 띨수록 정식 매장의 매출은 줄었다. 결국 주요 명품업계는 전략을 바꾸었다. 전세계에서 가격을 엇비슷하게 유지하는 ‘가격 평준화’ 정책을 쓰게 된 이유다. 유럽에서 매출이 줄더라도 아시아 지역 등에서 매출 증대를 기대했다.

샤넬을 비롯한 명품 업체의 도박은 성공하는 분위기다. 아시아 시장에서 가격을 내렸다고 브랜드 가치가 훼손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장사가 잘 되면서 브랜드 가치는 더 비싸졌다. 리서치업체 밀워드브라운의 ‘2015년 브랜드Z’ 결과에 따르면 샤넬의 브랜드 가치는 지난해보다 15% 올라간 90억 달러를 기록했다. 명품 업체 중에서는 4위를 기록했다. 중국과 홍콩, 한국 등에서는 제품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가격을 낮춘 샤넬 가방이 대부분 완판될 정도다. 엘리자베스 정 밀워드브라운 글로벌 브랜드 평가 디렉터는“샤넬의 가격 평준화 전략은 경쟁 브랜드를 압도하는 ‘신의 한 수’였다”고 말했다. ECB가 경제 위기를 막기 위해 쓰는 양적완화가 ‘명품의 경제학’을 다시 쓰고 있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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