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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4)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77)-하몽 이상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l934년 봄 박석윤이 만주국 주피난 총영사로 나간뒤 오랫동안 공석중이던 매일신보 부사장자리에 중외일보 사장이던 이상협이 취임하여 왔다.
하몽 이상협은 세상이 다알고 있는 우리나라 근대신문의 어버이다. 최준은 그의 저 『한국신문사』에서 『그는 「동아」를 창간하였고 「조선」을 혁신, 부흥케 하였으며 「중외」를 주재하였으니 그동안 모든 신문기자들은 이상협을 중심으로 육성되어 왔다』고 하였는데, 그가 동아일보·조선일보·중앙일보등 민간3대 신문을 창간, 또는 중흥시켰고 많은 쟁쟁한 신문기자를 양성하여 우리나라 언론계에 불후의 업적을 남겨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생활이 극도로 곤궁하여 어쩔수없이 자신이 신문기자로 출발하였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로 다시 돌아오게 된것이다. 운명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어쨌든 애석한 일이었다.
하몽 이상협은 서울출신으로 보성중학을 졸업한뒤 잠시 동경 경응대학에 적을 두었다가 서울로 돌아와 1912년 당시 유일한 언론기관 이었던 매일신보에 입사하였다. 그뒤 놀라운 신문기자적 재질을 발휘하여 l916년 약관 23세로 편집장에 승진하였다.
독립운동이 터진 19l9년 3월1일 그는 매일신보 사옥 2층에서 대한문앞 수만 군중이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부르는것을 바라보고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하여 그날로 매일신보를 사직할 결심을 하였다.
그해 가을 재등총독이 부임하여 문화정치라는 간판을 내걸고 민간신문의 발간을 허용할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최남선의 신문관에서 일을 보던 이상협은 용약하여 신문을 발간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앞서 매일신보 재직때 친분이 있던 영문기관지 「서울프레슨 사장인 산현 오십웅을 찾아가 의논하였다. 산현은 총독의 고문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있었다고 이 산현이 총독을 만나보라는 말을 해 그의 소개로 이상협은 총독을 만났다. 총독은 27세의 이상협을 대하자 『어째서 신문을 하려느냐』고 물었다.
『독립운동은 차치하고 우리 조선사람은 총독부에 대해 할말이 많다. 그리고 총독부로서도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알아야할것이 아닌가. 이때문에 조선 민중의 의사를 표현하는 기관으로 신문이 필요하므로 신문을 발간코자 하는것이다』
총독은 젊은 나이답지 않게 당당하고 늠름한 그의 대답을 듣고 속으로 감탄해 『잘 알았으니 서류를 내 보라』고 호의 있는 답변을 하였다.
이렇게해서 이듬해인 1920년 1월 이상협을 발행인으로하는 동아일보의 발행허가가 났다.
신문의 발행권을 얻은 이상협은 최남선의 아우 최두선이 중앙학교 교원이었으므로 젊은 사업가인 김성수를 움직여보려고 그를 통하여 김성수에게 교섭을 개시하였다. 김성수는 뜻밖에 이에 응하여왔으므로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이상협의 판권과 김성수의 재력으로 동아일보가 탄생하게 된것이다.
당시에 있어서 신문발행에 대한 모든 지식을 가진 사람은 이상협밖에 없었다. 편집으로부터 시작해 판매·광고·영업·사진제작·공장의 운영 등 신문을 만들어 내고, 팔고, 광고를 얻어 오고 하는 신문경영의 모든 절차와 설비를 하나에서 열까지 이상협은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신문의 백과사전이었다. 이상협은 신문사 사장이 신문의 간판이므로 김성수등 여러 사람과 신중히 의논해 박영효를 추대하기로 결정하였다. 박영효는 갑신정변의 가담자이고 후작이어서 조선 민중과 총독부가 탈잡을수 없는 가장 적당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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