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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의 시대공감] 창조경제 센터에서 생긴 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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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호 31면

얼마 전 한 대기업 임원이 하소연했다. 그 기업도 창조경제혁신센터 한 지역을 맡은 모양이다. 센터를 어떻게 만드느냐를 두고 당국자와 서로 의견이 엇갈렸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계속 설득하자 그 당국자는 “우선 이렇게 만들고 VIP(대통령)가 보고 가신 뒤에 마음대로 뜯어 고치라”고 하더란다. 창조경제를 하려는 건지,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한 사람의 말로 창조경제혁신센터를 폄훼(貶毁)할 수는 없다. 그 당국자의 개인 의견일 수도 있고, 일정에 쫓겨 과장해서 뱉은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통령의 눈만 신경 쓴다는 인상을 주지 않겠는가. 정부의 신뢰는 또 어떻게 되나. 가뜩이나 혁신센터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선이 적지 않다. 창조경제를 막는 주범으로 지목되는 대기업에 전국을 쪼개 맡겨 무엇을 하자는 거냐고 한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관 주도인가, 그것도 ‘창조’를 하자면서, 라고도 한다. 이런 판에 수 백억원씩 들여 이벤트나 벌인다는 오해를 받기 딱 좋은 말이 아닌가.

초등학생 시절 ‘새교육’이란 교사용 잡지에서 본 만화가 생각난다. 장학사가 학교를 둘러보며 환경 미화를 잘 했다고 칭찬했다. 그런데 장학사가 ‘꽃이 참 예쁘네’라며 화분을 만지자 쑥 빠져버렸다. 뿌리 없이 줄기만 잘라 급하게 화분을 만든 것이다. 작가가 꾸민 이야기가 아니었다. 만화 아래에는 어느 학교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고 자세히 소개해놨다. 어린 마음에도 어른들이 참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역대 정부마다 이전 정부를 비판하면서도 이런 이벤트 정치는 반복돼 왔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권력자의 눈에 들려고 별짓을 다하기 때문이다. 구호와 이벤트는 지지도를 높이는 데 효과적이다. 하지만 실속이 없다.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특히 외교가 그렇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해외순방에서 돌아올 때 국내정치만 생각하면 골치가 아프다고 했다. ‘외교는 귀신, 내치는 ⅹ신’이라고 비난을 받을수록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나가면 잘하건 못하건 국가원수로 대접받는다. 그러니 대개 대통령은 임기 중 6대주를 모두 순방한다. 박근혜 대통령도 2년만에 아프리카만 남겨놓았다. 그러나 외교부 장관이 대통령의 순방 스케줄을 짜는 데 공을 들여서는 곤란하다. 온갖 힘을 다 쏟아도 살벌한 동북아에서 살아갈 방도를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외교로 이벤트를 하면 그 후유증이 두고두고 국민에게 빚으로 남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버르장머리’란 말로 한·일 관계에 치명타를 입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도 마찬가지다. 독도 방문하는 날 아침 청와대 참모들은 들떠서 “굉장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자랑했다. 잠깐 속이 시원했는지 몰라도, 그래서 무엇이 달라졌나.

박정희 정부 시절 툭 하면 공설운동장에 학생들이 동원돼 반일 구호를 외쳤다. 관변단체들이 앞장서 열변을 토하고, 혈서도 썼다. 반일은 한국에서 효과적인 정치수단이다. 그러나 외교는 현실이다. 언제나 이기는 건 힘이다. 징징거리다 맞으면 더 불쌍하다.

동북아는 강대국의 힘이 맞부딪치는 곳이다. 미국은 일본에 보통국가 이상의 역할을 요구한다. 미국의 현실적인 선택을 우리가 과거사로 막을 수는 없다. 싫다면 버려야 한다. 미국에 맡겨놓은 전시작전권은 어떻게 할 건가. 미군이 없어도 북한의 미사일, 핵무기에 대응할 힘은 있는가. 주변국들은 다 아는 사정을 우리만 모르는 건가. 미국의 한 마디(1985년 플라자 합의)에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보냈다. 최근 엔저(円低)와 함께 일본의 경기가 살아나는 배경에도 미국의 지원이 있다. 이런 미묘한 문제를 군중의 먹잇감으로 던져주는 건 무책임하다.

외교는 국가간의 약속이다. 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사죄를 바탕으로 미래지향의 신시대를 열어나간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면 또 다른 프레임을 요구한다. 국제적 신뢰의 문제다.

위안부 문제는 일본이 사과해야 한다. 역사 왜곡도 묵과할 수 없다. 그렇다고 격변의 동북아에 사는 우리가 그 문제 하나에 모든 것을 다 묶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를 습격한 북한에 이후락 정보부장을 보냈다. 한국을 침략한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비난하고 외면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이기려면 욕을 먹더라도 실리를 얻고 힘을 키워야 한다. 세계를 순방하며 박수를 받기보다 비난 받을 각오가 더 필요하다. 그런 큰 그림을 그리는 참모를 쓰는 건 리더의 능력이다.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 jink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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