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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성 호<본사 논설위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대학입학정원의 자연계대 인문계비율이 6대4로 자연계우위로 돌아선다는 소식은 21세기 기술문명의 여명기에 처한 우리로서 남다른 감회를 느끼게 한다.
실로 5년동안 방황하며 대학정원정책이 이제야 비로소 제방향을 찾고 있는 것 같다.
기술입국의 구호가 고창되던 79년까지만 해도 대학입학정원은 자연계 .59.5, 인문계 40.5의 비율로 자연계가 우세했다. 그러나 80년부터의 졸속한 대학정원 증원정책으로 증원이 손쉬운 인문계만 잔뜩 늘려 급기야 84학년도엔 자연계의 비율이 43.3%까지 급전직하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과학·기술인력의 확보가 시급한 때에 이처럼 분별없는 대학교육정책의 선회를 보고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만약 이 추세로 간다면 91년에 기술인력수요에 큰 구멍이 생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고급 과학 두뇌(박사·석사)의 부족도 심각한 양상을 띠기 때문이다. 당국의 추계에 따르면 91년의 고급두뇌는 7만7천여명이 필요한데 공급능력은 4만7천명 수준에 머문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산업체에선 자연계 대학졸업생을 구하지 못해 아우성을 치는 곳이 많고 보면 사태를 방관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행히 정부는 입학정원을 자연계 76, 인문계 24의 비율로까지 조정해서라도 대학총원을 급격히 6대4의 비율에 접근토록 한다니 과거의 방만한 정원책정에서 심기일전한 노력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자연계 대학생의 증원을 갈망하는 이유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다가오는 21세기는 고도의 기술·정보사회가 될 것이고 여기에 적용하려면 과학인력의 확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세계각국의 대학정원은 인문계가 약간 우세하긴 하나 유럽의 경우 복선식 교육제도로 인한 기능인력 (공고, 공업·기술 초급대) 이 저변을 방지고 있음을 간과하면 안된다.
역사상 우리가 과학·기술인력의 확보를 지극히 갈망했던 때가 꼭 한번 있었다. l8세기 중엽에 꽃피운 실학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임란과 호란, 당쟁과 부패로 피폐해진 우리 경제서 일으키자는 운동이었고 문턱 (북경) 까지 이른 서방 기술문명을 과감히 받아들이자는 개화사상이었다.
담헌 홍대용은 『자연을 다스리자면 기기를 만들어 측정하고 계산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아울러 과학기술이 『어찌 말기라 이르리오. 오히려 정신의 극한이다』 라고 찬양했다.
다산 정약용은 『인간이 금수와 다른 점은 기술을 갖는데 있다』고 설파했다.
성호 이익은 유생의 윤리를 좀벌레의 윤리라고 통박하며 『나는 실오라기 하나도 생산하지 못하였다. 어찌 사회의 좀이 아니랴』 라고 자성하기도 했다.
연암 박지원은 『정덕후에 이용후생이 있다』 는 종래의 논리를 비판하며 『이용이 있는 연후에 후생이 가능하고 후생이 있는 연후에 정덕이 가능하다』 고 말했다.
19세기 산업사회 도래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갖지 못한 이둘 선각자들이 벌써 그때 과학·기술의 진흥을 역설한 것은 참으로 존경 할만 하다.
오늘날 우리의 미래학은 21세기의 면모를 거의 정확히 그려내고 있다. 경제학자 「월터· 로스토」 조차 경제학이 정밀성을 갖추려면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의 발전성향을 예의 수시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과학·기술교육의 중요성이 명고 관화한 시점에서 우리가 과거 실학파의 주장을 외면함으로써 겪었던 고통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게 된 것은 정말로 잘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 남은 것은 과학교육의 질적 충실을 기하는 일뿐이다.
21세기의 여명기를 살아가는 우리로서 한가지 해야 할 일을 한 것 같아 흐뭇한 마음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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