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트리스·보글보글 … 추억의 전자오락실 지켜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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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촌지기’ 설재우씨가 23일 다시 문을 여는 서울 옥인동 용오락실의 ‘철권’ 오락기 앞에 앉았다. 설씨는 “오락기는 손맛이 중요하다”며 “폐업한 울산 오락실에서 15년 된 오락기를 구해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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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집 건너 한 집꼴로 카페인 서울 종로구 옥인동의 한 골목엔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을 끄는 가게가 있다. 이 가게엔 추억의 오락실 기계 10여 대가 자리 잡고 있다. 운영난으로 문을 닫은 지 4년만인 오는 23일 다시 문을 여는 ‘용오락실’이다. 오락실엔 20여 년 전 청소년들이 엄마 몰래 찾아와 정신없이 두드리던 테트리스, 철권 등 추억의 게임기가 그 시절 그 모습으로 남아있다. ‘용오락실’의 부활을 꿈꾸는 서촌지기 설재우(34)씨를 17일 용오락실에서 만났다.

 서촌에서 나고 자란 설씨는 중·고등학생 시절 방과 후 매일같이 친구들과 오락실에서 일전을 벌이던 ‘용오락실 키드’였다. 20년간 운영된 이 오락실에선 주인 할머니가 학생들을 친손자처럼 맞아주곤 했다. 할머니는 설 인사를 온 학생들에겐 500원씩 세뱃돈을 쥐어줬고, 너무 오래 오락기 앞에 앉아 있는 학생들에겐 “아가, 얼른 들어가서 공부해야지”라고 훈계하기도 했다. 일대 오락실이 사행성 성인오락실로 바뀌어갈 때도 할머니는 "그렇게 해서 돈을 벌고 싶지는 않다”며 옛 모습을 그대로 지켰다. 하지만 용오락실은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2011년 문을 닫았다. 할머니는 고향인 전남 구례로 내려갔다. 설씨는 "단순히 오락실 하나가 사라진 게 아니라 우리의 유년시절과 한 시대의 문화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고민 끝에 설씨는 2011년 용오락실 부지를 인수해 소품점을 운영하다가 올해 오락실을 다시 부활시키기로 결심했다. 사라져가는 서촌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서다.

  설씨는 "2010년부터 서촌에선 사람 냄새가 옅어지고 돈 냄새만 진해졌다”며 “마을의 이야기들이 담긴 미용실·약국 ·쌀집·철물점은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외지인들이 운영하는 카페가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가 소품점을 그만두고 떠나면 이 자리에 또 카페가 들어설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6일 설씨는 ‘전자오락 수호대를 모집합니다’라는 문패를 내걸고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했다. 열흘 만에 30만원 후원자 10명과 10만원 후원자 10명이 나타나 400만원이 모였다. 웹툰작가, 가구디자이너, 기자, 의사, 오락실 게임 매니어들이 자발적 후원자가 됐다. 설씨는 "문화유산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며 "주민이 지역의 주인이 돼 서촌의 아날로그 감성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각오로 용오락실을 운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김민관 기자 kim.mink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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