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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일과 석유의 맞교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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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호세 비센테 랑헬 베네수엘라 부통령은 회담이 끝난 뒤 짤막한 성명을 발표했다. 두 사람은 평양과 카라카스에 대사관을 상호 개설하는 문제와 석유협정 체결 가능성을 논의했다는 것이다. 그가 베네수엘라를 다녀간 지 한 달쯤 지난 지난해 11월 임경만 무역상을 단장으로 한 북한 경제사절단이 카라카스에 나타났다.

세계 5위의 산유국인 베네수엘라는 지난해 6월 중국에 처음으로 180만 배럴의 원유를 수출했다. 8월에는 베네수엘라 유전 합작 채굴 계약이 양국 국영석유회사 간에 체결됐다. 장기적으로 중국 석유 수요의 15~20%를 베네수엘라가 공급한다는 야심 찬 목표도 제시됐다. 한 달 뒤 평양은 양 부위원장을 베네수엘라에 보냈다.

베네수엘라에서 중국으로 가는 유조선이 남포나 신의주에 잠시 기항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미국 보수파 논객들의 고민은 여기서 출발한다. 그중 한 명이 고든 커컬루다. 예비역 중령 출신으로 보수 진영에서 활발하게 기고와 저술, 강연 활동을 하고 있는 커컬루는 북한 경제사절단이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에게 풀어 놓은 상품 목록에 북한제 미사일이 포함돼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사정거리가 700km인 북한제 스커드 C형 미사일은 베네수엘라에서 파나마 운하까지 날아간다. 1500km인 노동 미사일로는 미 플로리다 남부 연안이 사정권에 들어온다. 대포동 미사일로는 미 동부를 가격할 수 있다. 석유산업 국유화를 통해 자원을 무기로 활용하려면 군사적 자위력의 확보가 필요하다. 그래서 차베스는 무기 구매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극심한 에너지난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으로서 석유 확보는 절체절명의 과제다. 석유와 미사일의 맞교환은 북한과 베네수엘라 모두 포기할 수 없는 매혹적 거래라는 것이 커컬루의 주장이다.

중남미의 좌경화는 2006년 국제사회의 최대 화두 중 하나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우루과이.칠레에 이어 볼리비아가 좌파정권으로 넘어갔고, 니카라과.과테말라. 멕시코에서도 좌파의 집권이 유력시되고 있다. '21세기 사회주의'의 리더를 자처하는 차베스는 중남미의 좌파 돌풍을 주도하며 반미(反美)주의의 선봉에 서 있다.

지난주 카라카스를 찾은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당선자와 차베스는 반미.반제(反帝) 공동전선을 선언했다. 또 "진정한'악의 축'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라며 "쿠바.볼리비아와 함께 새 천년의 새로운 축으로서 '선의 축'을 구축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어 차베스는 매달 15만 배럴의 경유를 볼리비아에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미 볼리비아가 베네수엘라에 농산물을 공급하고 있기 때문에 현금은 단돈 1센트도 낼 필요가 없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현물 맞교환은 반미 동맹국 간 기본 거래방식이라는 뜻이다.

베네수엘라를 방문한 양 부위원장은 "미국은 북한과 베네수엘라를 압박하기 위해 갖가지 적대적 음모를 진행 중"이라며 "적의 음모에 맞서기 위해 양국 간 단결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반미의 축을 주창한 셈이다.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가 지목한 이라크.이란.북한 등 '악의 축' 3개국에서 이라크의 빈자리를 베네수엘라가 채워주고 있는 형국이다. 이란과 베네수엘라는 산유국이다. 북한은 이미 이란에 미사일을 제공한 전력이 있다. 미사일과 석유를 매개로 북한은 베네수엘라와도 손을 잡을 것인가. 중남미에 이는 좌파 물결 속에 올 한 해를 뜨겁게 달굴지 모르는 새로운 이슈가 물밑에서 꿈틀대고 있다.

배명복 국제담당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