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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 날조 파동으로 성찰 얻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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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거셴크론' 이론은 원래 프랑스.독일 등 유럽에 국한돼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바로 여기에 딱 맞아떨어지는 사례였다. 대발진은 적극적인 해외기술 도입, 규모 추구형 중화학공업에 의해 추진됐고, '관치금융'이 이를 지탱했다. 나아가 '하면 할 수 있다'는 슬로건이 있었다. 그리고 그 대발진은 외환위기로 종언을 맞았다.

하지만 지난 한 해 동안 한국을 열광시키고 또 절망시켰던 줄기세포 논문 조작 사건 역시 거셴크론적 '동원(動員)'시대의 종언을 다시 한번 절실히 느끼게 해 준 것이었다.

세계적으로 과학기술 개발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날조도 흔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이번 한국의 사례는 '거셴크론적'이었다. 선발국에는 생명윤리상의 여러 규제와 갈등 등이 있어 '후발 주자의 이익'이 존재할 수 있었다. 또 '과학기술 입국'을 지향하는 정부가 집중적인 지원을 했다. 첫 노벨상 획득에 대한 국민의 심리적 기대가 드높았다.

한편 이와 대조적인 것이 3년 전 노벨 화학상을 받은 일본 다나카의 경우다. 학부 졸업에 박사학위도 없는 중견기업 연구원이 노벨상을 받게 된 논문의 기고는 실은 독일 연구진보다 1개월 뒤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독일 연구진이 그 이전부터 다나카의 업적을 공정하게 언급했기 때문에 다나카는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다. 여기에 일본 정부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공정함을 잃지 않고 상 같은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새로운 연구에 몰입하고 싶다"고 말한 그는 유명해지는 것을 거부했다. 국회의원 출마 권유 같은 것도 없었다. 회사 유니폼에 명찰을 달고 연구실을 오가는 그의 생활은 큰 변화가 없다. 명성과 부에 대한 집착은 수상자에 따라 개인차가 있다. 하지만 연구자의 본질이 '끝없는 도전'인 이상 대부분 다시 연구실로 돌아간다.

통렬한 경험은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있는 한 플러스 효과를 가져온다. 외환위기를 극복한 한국 기업의 경쟁력은 놀랍다. 과감함.적극성 등 원래의 강점에다 전문성.치밀함.국제성.긴장감이 더해졌다. 전문경영인의 수준은 세계 최고급이다. '신용'을 잃은 기업이 시장에서 어떤 보복을 당하는지 경험한 이상, 그리고 자유화를 수용해 외국인 주주를 무시할 수 없게 된 이상 오너들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됐다. 한국은 위기로부터 실로 많은 것을 얻은 것이다.

이번 경우도 많은 내성(內省)이 가능하다. 기술은 한 명의 천재적 두뇌뿐 아니라 경쟁적 연구자.기술자들의 '두꺼운 층'을 필요로 한다. 연구지원에는 막대한 자금뿐 아니라 배타적 애국주의에 입각한 기대로부터의 자유로움도 필요하다. 안정적으로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경쟁적이면서 자극적인 환경도 요구된다. 연구개발의 가치판단은 어느 나라건 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과도한 상업성 내지 정치성은 바람직하지 않다. 진정한 '과학기술 입국' 실현에는 다양한 내성을 살려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해 보면 '과학기술 입국'이란 '후발주자의 이익'을 버리고 스스로 프런티어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 '거셴크론적 모델'과의 결별은 필연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개혁이 그랬듯 노력을 계속해 나가는 한 위기는 또 기회로 변할 것이다. 거셴크론 모델의 종언을 출발점으로 하는 새로운 해로 만들어야 되지 않겠는가.

◆약력=미국 예일대 석사, 일본 와세다대 박사과정 수료(경제사), 일본무역진흥공사 연구원, 한국산업연구원 객원연구원

후카가와 유키코 일본 도쿄대 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