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진기자의맛난만남] 프로기사 이세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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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에 얽매이지 않는다, 자유분방하고 자신감 넘친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다소 엉뚱하다, 예의 없고 건방지다는 비난도 제법 받는다…. 이세돌 9단에 대한 선입견은 방향이 명확하다. 공격적이고 예측불허인 대국 스타일처럼 그도 편하게 대하기 힘든 인물이라는 것이다. 인터뷰 요청을 위해 여러 번 연락을 했지만 좀처럼 휴대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달 만에 통화가 되어 약속 시간을 잡고 단골 식당을 물었더니 "늘 가는 곳이 몇 군데 있는데, 어디서 먹을지는 그날 만나서 정하자"고만 대답한다. 사진 촬영을 꺼린다는 말까지 들은 터라, 인터뷰가 잘 진행될까 고민을 안고 그를 만났다.

"그렇지도 않은데"라며 피식 웃어 보이지만, 그도 자신에 대한 선입견에 불만이 많은 눈치다.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괜스레 물잔을 이리저리 기울여 본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밖에서 보는 이세돌과 실제의 나는 무척 다르다. 개방적이고 앞서 나간다고들 하는데 실은 또래에 비해 보수적인 편이다. 개성은 있는 편이지만, 남을 곤란하게 만들 만큼 엉뚱하지는 않다."

주문한 뚝배기 불고기가 나왔다. 두툼한 뚝배기 속에 양념한 고기와 양파.버섯.당면이 그득 담겼다. 고기를 몇 점 집어 먹더니 뚝배기에 밥을 넣고 시원스레 국물과 비빈다. 밋밋한 음식보다는 자극성이 강한 맵고 짠 음식을 좋아한다. 주로 고기.찌개나 탕류 등 '회식용 메뉴'를 잘 먹는단다. 지난 가을에 만난 여자친구가 스파게티와 피자를 좋아하는데, "함께 가면 마늘빵밖에 먹을 게 없더라"며 엄살을 부린다.

여섯 살 때 아버지에게 바둑을 배우기 시작해 열두 살에 프로기사로 입단했다. 빠른 수 읽기와 독창적인 감각을 선보여 "조훈현 이후 최고의 천재"란 찬사를 들으며 성장했다. '겨우 지킬 줄 아는 단계(수졸.守拙)'라는 초단에서 '입신(入神)의 경지'인 9단에 이르기까지 고작 8년이 걸렸다. 2003년에는 '바둑황제'인 이창호 9단을 이기고 세계 최고의 자리를 밟았으며 지난해까지 메이저 국제대회 11연승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국내 프로기사 중 최고의 수익을 올려 '2005년 상금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식당을 나와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진한 에스프레소를 골랐다. "죄송하지만"하고 양해를 구하더니 담배부터 한 대 피워 문다. "프로기사는 30세를 넘기면 실력이 나아지기 힘들다"고 말을 꺼낸다. 고도의 집중력과 체력이 필요하다 보니 나이가 들면 원숙해지는 면은 있지만 앞으로 성큼 나아갈 수는 없다는 게 통설이라고. 그래서 몇 년 안에 이창호 9단을 넘어 명실상부한 세계 바둑의 1인자가 되는 것이 현재 그의 목표다. 길게는 조훈현 9단처럼 나이를 먹어서도 현역으로 뛰는 기사로 남고 싶단다.

"바둑 말고 다른 계획은 없느냐"고 묻자 얼굴에 장난스러운 표정이 돌아온다. 스키장에 가 본 적이 없어 친구들에게 '원시인' 소리를 듣는단다. 이번 겨울이 가기 전에 꼭 여자친구와 스키를 배우러 가기로 했다. 책을 많이 읽고 세상에 대한 공부도 하고 싶다. 바둑에 전념하기 위해 중학교를 중퇴했다.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요즘 부쩍 든다.

"너무 어릴 때 인생을 결정한 데 대한 아쉬움은 없느냐"고 묻자 어깨를 한번 들썩 해보인다. "이제는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바둑이 재미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대신 이기고 싶다. 끝까지 올라가 보고 싶다는 승부욕이 강해졌다. 아직 바둑으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한다고 말할 단계는 아니지만, 아마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다."

최근에 "이세돌이 변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지루하고 음식도 맛이 없다"는 이유로 참석하지 않던 각종 바둑 행사에 간혹 모습을 비춘다. "내 적수는 이창호 9단뿐이며 실력으로는 내가 위일 수도 있다"고 했던 예전과 달리 동료기사를 칭찬하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도 보인다. 그의 바둑 역시 공격 위주의 기풍에서 벗어나 차분해졌다는 평이다. 정작 본인은 "글쎄, 변했나"라며 웃을 뿐이다. 자신의 성향과 실력을 뚜렷한 단어로 규정하기는 이르다는 것. 그의 인생도, 바둑도 아직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글=신은진 기자 <nadie@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 이세돌 9단과 함께 간 '서울본가'

한국기원 인근에 위치해 프로기사 단골이 많은 고깃집. 점심에는 갈비탕.뚝배기 불고기 등으로 간단히 식사를 하고 저녁에는 등심이나 갈비를 구우며 소주 한잔 주고 받는 곳이란다. 인근에서 고기 맛이 좋기로 제법 소문이 났다. 생등심 2만5000원, 갈비탕.뚝배기 불고기 6000원. 서울 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역에서 10분 거리, 한국기원 왼편 골목으로 40m 정도 들어가면 간판이 보인다. 02-2298-5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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