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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 못 찾는 한·일 관계 개선되면 미·중 사이에 낀 한국 활동공간도 넓어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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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호 10면

한국과 일본이 과거사를 놓고 본격적으로 힘겨루기에 들어간 지 벌써 3년이다. 그동안 한·일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반등의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50년 전 박정희 정부는 냉전 환경하에서 미국·일본과 반공연대를 공고히 하는 안보 논리, 그리고 일본의 청구권 자금으로 경제성장의 길을 여는 경제 논리로 과거사 청산이라는 역사 논리를 넘을 수 있었다. 반면 2015년 박근혜 정부는 안보적으로 한·미 동맹을 견고히 하고 경제적으론 중국과 협력한다는 전략 속에서 일본의 전략적 가치를 평가절하해 왔다. 그만큼 일본과 역사갈등을 봉합하고 타협할 유인이 떨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단순논리로 21세기 동아시아의 격랑을 헤쳐나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미래사의 시각에서 볼 때 동아시아 시공간은 과거사의 유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일 관계 정상화 시급한 까닭

한국이 소망하는 동아시아의 미래는 기성대국 미국과 신흥대국 중국 간 세력전이가 평화적으로 이뤄져 역내 중견국·약소국이 경제적으로 상호의존하며 공존 공영하는 세상이다. 다시 말하면 이른바 ‘신형대국관계’란 슬로건처럼 미국이 중국과 평화적으로 경쟁하고 협조하는 길이 열리지 않으면 주변부는 괴롭다.

일본이 문제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부는 점차 강대국화하는 중국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중국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과 가이드라인 개정으로 미·일 동맹을 강화하고, 센카쿠·댜오위다오 영유권 분쟁 시 미국의 개입을 확인하는 등 중국을 군사적으로 견제하기 위한 발 빠른 행보로 미국 조야의 축복을 받고 있다. 그러나 아베 정부가 원하는 ‘미국·일본 대 중국’이란 대결구도는 시대적 흐름을 거스르는 행보다. 역내 국가들이 미·일이냐 중국이냐의 두 줄을 서야 하는 동아시아의 분단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일 관계는 대단히 중요하다. 한·일 관계가 양호하면 미·일의 중국 견제 수위가 적절히 하향할 수 있고 미·중 사이에서 한국의 활동공간도 넓어진다. 그러나 한·일 관계 악화로 현실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일본은 한국이 중국으로 기울고 있다고 비판하며 미·일 동맹의 끈을 조이고 있고, 중국은 이를 틈타 한국을 끌어들이려 하며, 미국은 한국을 서서히 압박하고 있다. 한국은 중국과 미·일 두 고래가 만드는 파고 속에서 표류하는 새우 신세가 되는 것이다.

한·일 관계 악화는 경제적인 면에서도 대단히 부정적이다. 단순히 투자와 관광인원 축소 정도가 아니라 지역 질서 차원에서 한국의 행동반경을 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세력판도를 보면 미국이 주도하는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가 앞서 가고 있고 중국이 RCEP(지역포괄경제협정)와 한·중·일 FTA 등으로 반격하는 양상이다. 한국은 TPP에 참가하는 동시에 RCEP와 한·중·일 FTA 교섭을 진전시킴으로써 두 네트워크가 향후 통합될 수 있도록 중견국의 중개자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다. 그러나 한·일 관계 악화는 이런 시도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중·일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수행할 수 없도록 가로막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과 일본은 나빠질 수 없는 관계다. 안보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다양하고 깊은 이익을 공유하고 있고, 문화적으로도 친숙해 긴밀하게 지낼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봐도 과거사 여러 문제로 때론 얼굴은 붉히지만 복원력 역시 강하다. 현재 최악의 관계를 겪고 있다지만 불과 3년 새 일어난 일이라 앞으로 하기에 따라 급속도로 회복될 수도 있다.

현재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여러 노력을 하고 있다. 당부하고 싶은 건 목표가 단지 관계 회복과 정상회담 개최 차원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점이다. 한·일 관계는 이미 과거사를 푸는 정도의 양자관계 외교사안을 훌쩍 넘어 지역질서 변동에 주요 요인으로 자리 잡았다. 냉철하고 복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과거사를 풀고 미래로 나아간다는 단선적 사고를 넘어 미래 속의 과거를 상상하며 공생과 공영의 신(新)동아시아 지역질서를 만들어 간다는 차원에서 대일 정책을 모색해야 한다.

손열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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