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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올림픽 존속은 인류양심의 승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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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내노라하는 미국의 몇몇 신문은 올림픽에 관해 입만 벙끗하면 서울올림픽의 반대논조를 편다. 그런 주장의 공통점이 있다면 논리가 제대로 서있지 않고 다분히 감정적인 면에 치우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의 막이 내린 지난 12일밤(현지시간) LA메모리얼 콜리시엄의 전광판에는 「SEE YOU IN SEOUL」(서울에서 만납시다)이라는 글자가 아로 새겨겼고 세계 25억의 시청자가 TV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들은 올림픽기가 제24회 올림피아드 개최지역인 서울시장에게 넘겨진것도 목격했다.
바로 그 다음날 로스앤젤레스 타임즈는 서울올림픽을 반대한다는 한 중진논설위원의 기명기사를 한 페이지를 온통 할애해 실었다. 미국의 양심을 대변한다는 이 신문의 중견언론인은 『미국처럼 부강하고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로부터 캘리포니아주의 4분의1에 지나지 않는 한 조그마한 개발도상국가』에 올림픽기가 넘어가는게 도대체 기분 나쁘다는 그런 투의 푸념을 논리라고 전개하고있다.
『1988년 9월17일 서울서 제24회 올림피아드가 개최될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게 된다한들 LA올림픽처럼 훌륭한 대회를 치를수 있을까.』

<보이코트 있을 수도>
이렇게 서울올림픽을 빈정대는 이 글은 곳곳에 「한국처럼 작은 나라」(The little nation)라는 문귀를 여러차례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다. 워싱턴이나 뉴욕쯤에서 다음 올림픽이 열리지 않은게 아주 기분 나쁘다는 감정적인 표현이다.
고작 서울올림픽 반대의 논리라고 내세우는것이 보이코트 국가가 있을것을 염려하는 대목이다. 『서울올림픽의 문제란 바로 오늘날 올림픽이 직면한 문제, 즉 「정치」다.』 LA타임즈는 그렇게 주장하면서 서울이 중공과 소련과의 국교관계가 없음을 지적한다. 국교가 없으니 불참은 환히 내다보이지 않느냐는 논리다. 그렇다면 미국과 소련은 서로 외교관계가 없어 모스크바와 LA올림픽을 보이코트했단 말인가.
미국의 언론이 올림픽의 보이코트가 진정 올림픽의 위기라고 생각했다면 「카터」 전대통령이 모스크바 올림픽의 불참을 선언했을때 차기올림픽의 장소를 LA가 아닌 딴곳으로 옮겨야한다는 주장을 폈어야 옳았다. 미국의 모스크바 불참선언은 곧바로 소련의 LA보이코트를 예견케 한 조치였다는 것쯤은 삼척동자라도 알 법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 당시 미국언론은 「카터」의 올림픽 불참결정에 박수만쳤지 올림픽을 정치와 연결시켜서는 안된다는 반론을 편 언론이라고는 보지 못했다.
정치적 이유를 내세워 올림픽을 보이코트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으로 마치 인류의 종말이 가까이 온 듯한 위기, 의식을 조장할 일은 못된다. 모스크바에 앞서 개최된 몬트리올대회에선 아프리카 24개국이 남아연방공화국 문제로 올림픽선수단을 철수시켜 버렸다.
이렇듯 연3회에 걸쳐 올림픽보이코트사태가 벌어졌으니 국제올림픽위원회(IOT)가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비상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것을 이해못할바도 아니다.
하지만 현대올림픽이 정치로 상처를 입은것이 엊그저께의 일이 아니다. 1, 2차대전은 아예 올림픽의 개최를 불가능하게 했으며 소련은 1912년 스톡홀름대회 참석을 끝으로 줄곧 올림픽을 외면해오다 1952년 헬싱키대회에 와서야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2차대전이 끝난뒤 올림픽이 부활(48년)되긴 했어도 제대로 열리기는 겨우 두 차례에 지나지 않았으며 56년 멜번대회때부터 불참사태가 빚어졌다. 영상의 수에즈운하 침공으로 중동3개국이 올림픽 참가를 거부했던것이다. 뮌헨(72년)의 대참사는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다.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11명을 납치, 살해하여 올림픽사상 처음으로 경기가 한때나마 중단되기까지 했다.
멕시코(68년) 대회는 더욱 심각한 사태에 부딪쳤던 올림픽이었다. 올림픽개막 10일전 폭동이 일어나 연방군에 의해 2백60명이나 떼죽음한 참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멕시코올림픽은 그런 시련을 겪으면서도 예정대로 개최되었다.
현대 올림픽은 이처럼 정치의 태풍권을 거쳐오면서 거의 한 세기를 거뜬히 존속해왔다.
이는 인류의 예지와 양심의 승리라고 해야한다.
서울올림픽을 보이코트할 국가가 없으라는 보장도 없다. 그러한 가능성은 어느나라에서 개최되든 항상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우려가 있다하여 올림픽개최지를 변경해야한다는 따위의 논리는 올림픽의 그 끈질긴 생명력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외면한데서 온 발상이라고 밖에할수 없다.
더더구나 한국과의 외교관계가 수립돼 있지 않은것이 서울올림픽에의 길을 막고 있다 함은 현실에 고개를 돌린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중공과 한국이 이미 스포츠교류를 하고 있는 사이라는 것을 미국언론이 모를리가 없다.
한국의 테니스팀이 중공을 다녀왔고 중공의 농구와 수영팀이 서울에서 경기를 벌인 사실을, 그리고 연내에 몇차례 양국간에 스포츠교류가 예정돼 있음을 미국언론이 굳이 모른 체하는 이유를 알수없다. 한국은 국교가 터있지 않은 쿠바에도, 폴란드등 동구권국가에도 선수단을 보낸바있다.
동구권이 서울을 찾지 않을 아무런 이유도 없다. 소련인들 무엇 때문에 서울올림픽을 거부한단 말인가. 북한을 얼러맞추기 위해서라면 세계에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야한다. 소련으로선 LA올림픽을 보이코트한 터여서 세상사람들을 납득시킬만한 이유를 다시 둘러대기는 어려운 처지다.
서울올림픽에 시비를 걸고있는 일부 미국언론의 주장이 이치에 닿지 않다는 것이 자명해졌다. 그런 주장을 굳이 국가적 우월감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보고 싶지도 않다.

<박수 칠땐 이념초월>
나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경기장에서 보인 미국인 관객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미국인 금메달리스트에게 보낸 뜨거운 갈채를 루마니아 체조선수에게도, 중공의 수영선수에게도 똑같이 선사했다.
미국의 복서를 때려 누인 한국의 금메달리스트에게도 그런 박수를 보내는 것이었다. 88년 서울의 올림픽경기장에서도 같은 모습을 세계인들은 보게 될것이다.
서울의 관객들은 미국의 육상4관왕에게 보낼 그런 갈채를 폴란드의 레슬링 금메달리스트에게도, 미국과 겨뤄 금메달을 딸 지도 모를 소련의 농구선수에게도, 또 루마니아의 체조요정에게도 한결같이 보내게 될것이다.

<끝>
손주환<편집국장대리·본사올림픽 취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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