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박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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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미국의 노파심은 알아주어야겠다. 미 국방성은 요즘 동남아의 신흥공업국들과 수출통제동맹 같은 것을 구상하고 있는 모양이다.
「신보호주의」얘기가 아니다. 한국, 대만등 신진공업국들의 산업기술이 혹시 소련쪽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표시다.
소련의 기술수준은 이미 서방에 상당히 노출된 적이 있었다. 소련공군「베렝코」중위가 미그 25기를 몰고 일본으로 망명했을 때 미·일의 군사기술자들은 그 전투기를 샅샅이 분해해 보았다.
그때의 결론은 한마디로「낫 옛」(not yet)-, 아직 멀었다는 얘기다.
그 뒤 미국의 첨단기술자들은 미·소의 군사기술 격차를 5년 내지 10년으로 평가했다. 물론 전반적인 수준의 얘기는 아니고, 컴퓨터와 소재산업 분야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소련은 최근 서방의 첨단 기술제품을 스위스 같은 제3국을 통해 수입하려다가 몇 차례 실패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나이브한 편이고 서방주재 외교관의 90%가 첨단기술 탐지정보요원들이라는 얘기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들의 공작은 주로 미국의 첨단산업에서 그만둔 퇴물 기술자들을 회유하는 일이다. 제3의 대리점이나 상사를 통해 이들을 고용하거나 이용한다.
미국의 기술 보안은 흔히「블랙박스」로 상징된다. 가령 일본은 지난 몇 년 동안 통신위성을 쏘아 올리기 위해 고심, 고심했었다. 그 실패의 큰 원인은 블랙 박스에 있다. 인공위성의 가장 핵심부분은 컴퓨터가 내장된 블랙박스인데, 미국에서 수입해야 한다.
미국은 그것을 수출은 하면서도 절묘하게 포장을 해놓았다. 일본의 기술자들이 그것을 분해하려고 시도하면 제물에 기계가 헝클어져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아예 그렇게 장치를 해서 일본에 넘겨준다.
미국은 요즘 신예전투기로 알려진 F-16전투기를 한국이나 일본에 의뢰해 고장수리나 분해 청소할 때도 바로 이 비행기에서 핵심, 이를테면 블랙박스 부분은 미리 빼놓고 넘겨준다.기술 유출의 노파심 때문이다.
오늘의 세계는 이미 기술세계에선 소리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미국은 바로 그 최대의 당사국으로 제3국마저 의심하고 있다.
글세, 기분이 좋다고 해야할지, 어이없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순서로 보아 서방국들끼리의 기술협력이나 제대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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