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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86) 제80화 30년대의 문화계(19)여배우 이월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50년동안 우리나라 연극계에 출연하여온 원로 연극인 변기종도『1923년에 우리연극계에 큰파문이 있었으니 그것은 곧 토월회의 탄생이었다』고 말하고있듯이 토월회의 공연은 서울의 극계에 큰 파문을 던져서 공연을 나흘이나 연장했는데도 구경꾼은 여전히 밀물같이 밀려 들어왔다.
이뒤로 서울의 거리에는 「카튜샤, 내사랑아. 이별하기 서러워」하는 『부활』 의 주제가가 유행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부활』의 제l막 사랑의 장면에서 조석원이 막뒤에서 「카튜샤, 내사랑아. 이별하기 서러워」하는 노래를 불러서 관객들의 박수를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공연이 끝난다음에 한때 박승희와 이월화의 사랑에 대한 풍설이 떠돌아 다녔다. 지난날의 애정편력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했던 이월화가 박승희에게서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때문이었다고 모두들 추측하였다. 귀공자 박승희와 사랑을 속삭이던 시골처녀「케디」역으로 나온 이월화로서 있음직한 일이었다.
그러다 이사랑은 마침내 짝사랑으로 끝났는데 이런일이 있었던때문인지 그것은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이월화는 그뒤로 술을 마시고 타락한 생활을 하다 마침내 연예계를 떠나서 l933년7월에 상해로 가는 도중에 일본문사에서 심장마비로 객사하고 말았다.
이월화는 본명이 이정숙으로 서울태생인데 학교는 진명보통학교를 나와 이화학당을 중퇴했다고 한다. 그의 특징은 비극의 여주인공역을 하는것인데 그 무렵에 영화 『월하의 맹세』에 출연해서 호평을 얻었고 특히 토월회에 나와 「카튜샤」역과 「케디」역을 성공적으로 해낸 뒤부터는 「조선극계의 꽃」 「조선의 유일한 여배우요, 예원의 여왕인 이월화양」하고 일반의 칭찬이 대단하였다.
이월화가 토월회에 나올때 이런 재미있는 일화가 있었다. 6월중순께 토월회회원들이 서울에 모여 공연준비를 하는데 다른 것은 다 준비가 되었지만 여배우가 시원치 않아 큰 걱정이었다. 그래 모두들 좋은여배우를 끌어들일 궁리를 하고있었다. 여기서 그때 토월회동인이었던 팔봉 김기진이쓴 『토월회 시대』란 글속의 이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같다.
『이월화가 나와주었으면 좋겠는데, 그 어머니가 아주 딱 정떼래. 신문사친구가 어머니 있는데서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월화는 나오고싶은 생각이 있었지만 어머니가 「이제는 어림도 없다. 신파연극엔 절대로 못나간다. 들어앉아서 시집갈 색시공부나 해라」하고 딱 거절을 했다는거야. 그러니까 우리들을 신파연극장이들이 모인 단체로 안 모양이지. 모두 한다한 양반의 자식들이구 동경유학생이란것을 그 어머니한테 인식시키고 간청을하면 허락이 될듯싶다고 이월화자신이 말하더래.
장영순·이서구가 이런 소리를 전하므로 이월화모친을 설득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기정아, 네가 월화어머니를 찾아가서 떼를 써라! 안된다거든 엉엉 울어라….」
이서구가 나를 보고 이렇게 선동하였다. 나는 그때 루바시카를 입고 장화를 신고 머리는 인두로 지지고 모자를 안쓰고 서울거리를 걸어다니던 때였다.
마침내 나는 석영 안석주와 함께 비오는날 두사람이 인력거를 타고 창성동 이월화의 집을 찾아갔다.
21∼22세로 보이는 월화가 게딱지만한 초가에서 나와 우리를 맞아들이고 모친에게 소개하였다. 나는 투바시카에 세비로 바지를 입고가서 무릎을 꿇고 그의 모친에게 절을 하였다.
이날 석영이 동경유학생의 신분설명과 보증으로 우리 세득공작은 대성공이었다.』
이렇게해서 김기진이 월화어머니한테 무릎을 꿇고 절을 해가지고 빼내온 것이 이월화였다. 박승희는 『이월화는 키가 날씬한데 얼굴도 야위지않고 어글어글한 큰 눈에서는 영롱한 영채가 빛났다』고 그를 만난 첫인상을 말하고있다.
아뭏든 이월화는 아까운 여배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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