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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에서 본 쿠바의 미래 <5>] 휴대전화가 없어지자 몸 안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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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니다드 구시가지의 메인 광장 북쪽에 위치한 삼위일체 성당.

우연한 기회에 보물 지도를 손에 쥔 소년은 카리브 해로 떠난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18세기를 배경으로 쓴 『보물섬』의 도입부다. 쿠바 중남부의 마을 트리니다드(Trinidad)는 그 소설에 딱 어울리는 마을이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식민지 시대 건축물들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지역 중 하나인 트리니다드는 1988년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19세기 이후에 지어진 건물은 없고 무데하르 양식 건축물들로만 이뤄진 이곳은 마법에 걸려 시간이 멈춰버린 동화 속 마을 같다.

광장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정원에 가까운 플라자 마요르(Plaza Mayor)를 가운데 두고 사방으로 가지처럼 뻗어나가는 길. 그 위엔 수많은 호박돌들이 촘촘히 박혀 다듬어져 있고, 끝이 없는 옛날 이야기처럼 꼬불꼬불 골목으로 이어진다. 그 길들 양옆으로 물고기 비늘처럼 촘촘한 주황색 기와가 덮힌 빛바랜 벽들이 있다. 만약 화가 보테로가 노랑과 초록으로 그린 마을이 현실에 존재한다면 그곳은 바로 트리니다드일 것이다.

보테로가 그린 듯한 마을

쿠바의 도시계획은 1537년 신대륙 식민지들을 위해 만들어진 법령(The Laws of the Indies)대로 네 블록마다 광장을 만들어야 했다. 그 광장에는 종교 시설이 들어섰다. 그래서 많은 라틴 아메리카의 도시들은 오늘날까지도 공간적인 질서와 정서적인 여백을 갖고 있다. 트리니다드에도 크고 작은 성당들과 종탑들이 곳곳에 있어서, 마을을 걷다가 종소리를 들으면 꿈속에서 깨어나는지 아니면 꿈속으로 들어가는지 헷갈릴 만큼 몽환적인 느낌이 들곤 했다.

프랑스어에 ‘플라네리(flanerie·산보)’라는 단어가 있다. 중학교 때 이 단어를 처음 접하고서 ‘특별한 목적 없이 한가로이 걷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와 닿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했었다. 그런데 사람이 거의 없는 18세기 쿠바 마을을 거닐면서 나는 뒤늦게 배울 수 있었다. 산보가 무엇인지를.

트리니다드의 상징인 `교회와 성 프란시스코의 수도원(Iglesia y Convento de San Francisco)` 종탑,

나른한 오후, 굽이굽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트리니다드의 골목길을 정처없이 홀로 걷다가 잠시 멈춰 나무 아래에 앉아 쉬고 있었다. 주변은 고요했다. 태양을 피해 다들 꼭꼭 숨었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얼핏 보면 그 집이 그 집 같지만 자세히 보면 하나같이 너무나 달랐다.

쿠바에 온 뒤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없어서 GPS나 디지털 기기의 도움 없이 본능에 의존하며 생활하는 데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오히려 신체의 일부처럼 의지하던 기기로부터 벗어나자, 내 몸의 감각들이 되살아나면서 ‘인간의 본성’을 되찾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수동적인 관습에서 벗어나 현재와 주변에 능동적으로 집중하며 과정을 즐기는 사람이 되고 있었다.

자코메티의 개가 이끈 만남

자코메티의 조각상처럼 마르고 길쭉한 몸으로 마을을 누비던 개.

모퉁이에서 느닷없이 검정 강아지가 나타나 내게 다가왔다. 삐쩍 마르고 길쭉한 몸매가 꼭 자코메티의 조각상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다른 점이라면 그 친구는 슬프거나 지쳐 있지 않고 명랑하게 통통 뛰어다녔다는 것이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보테로 마을에 나타난 자코메티 개는 짧디 짧은 꼬리를 흔들며 좋아했다.

그런데 내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자코메티는 벗어놓은 내 샌들 한 짝을 물고 달아났다. 내가 돌려달라고 소리쳤지만,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자코메티는 나를 놀리듯 깡충깡충 뛰며 내 주변을 맴돌며 입에 문 샌들을 놓지 않았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자코메티는 기다렸다는 듯이 방금 전에 뛰어왔던 골목으로 도망쳤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뜨끈뜨끈한 온돌길을 맨발로 밟으며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자코메티를 쫓아갔다.

`칸찬차라`는 럼·라임·얼음에 꿀을 넣어 마시는 트리니다드 전통 음료다.

“어디를 그렇게 급하게 가요? 시원한 칸찬차라(Canchanchara) 한 잔 마시고 가요. 호박엿도 있고, 좋은 시가도 팔아요. 더운데 가게 구경 좀 하다 가요.”

두리번거리며 강아지를 찾는 나를 어느 할머니가 불러 세웠다. 그는 수공예 기념품을 파는 작은 카페의 주인이자, 자코메티의 주인이었다. 럼·라임·얼음에 꿀을 넣는 트리니다드의 전통 음료 칸찬차라는 카스트로와 혁명 전사들이 게릴라 시절에 즐겨 마시던 음료라고 설명해줬다.

샌들을 되찾은 나는 다시 동화 속 마을을 감탄하며 걸었다. 계획에 쫓기지도 끌리지도 않고 짊어질 기억도 없이 그저 터벅터벅 걷다 보니, 나도 모르게 순간순간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칸찬차라에 무슨 약을 탄 거지? 단순한 취기인가? 아니면 18세기의 마을은 시간도 천천히 흘러가는 건가? 서울 시간의 기본 값이 ‘빠르게’라면 트리니다드 시간은 ‘어쩔 수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자주 걷지도 않았지만, 트리니다드에서 나는 마치 미술관 관람객처럼 거대한 작품의 색감과 질감을 하나하나 음미하고 있었다.

시간의 속도 그리고 새것이라는 신기루

서울에는 바쁜 사람들이 많다. 이해로 얽힌 인간관계 안에서 각자의 목적을 향해 일정에 맞춰서 달려가는 그들은 늘 약속에 치여 산다. 우정보다는 인맥에 가까운 그들의 친분은 투자 또는 자산에 가까웠다.

목표 지향적인 그들은 GPS처럼 효율과 효과를 우선시했고, 각자가 품은 욕망과 절박함에 의해 움직였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대체 어디로 그렇게 달려가는지.

지구 반대편과 반대인 것은 ‘시간의 속도’만이 아니었다. 낡았다기보다는 고전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트리니다드는 오래된 것의 편안함을 가르쳐줬다. 정당 이름에서부터 동네 분식집까지 ‘새’를 이름에 붙이지 않으면 불안해할 정도로 ‘새것’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나라에서 온 내게는 신선함을 넘어 신비롭기까지 했다.

사실 늘 궁금했었다. 너무나 많은 것을 쉽게 입맛대로 쓰고 버리고, 또 다른 것을 찾아 만들어 과거로부터 빨리 도망치려는 강박증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식민지, 전쟁, 빈곤의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헌마을’을 부수고 ‘새마을’을 만들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온 신조에서 왜 못 벗어나는 것일까. ‘새것’은 어쩌면 ‘내일’처럼 늘 존재하지만, 다가갈 수도, 잡을 수도 없는 신기루 같은 것이라, 그런 허상만 쫓다 보면 과정도 결과도 둘 다 놓치는 것이 아닌지.

쿠바에서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보다 오래된 차들이 갓 출고된 신차들과 함께 거리를 달린다. 서울에서는 10년이 넘은 차를 모는 나를 많은 이들이 이상하게 바라본다.

낡고 오래된 것과 새롭고 발전된 것은 공존해야 한다. 그래야만 둘은 서로 대비되면서 제각기 그 가치와 멋이 빛날 수 있다. 어제와 오늘을 봐야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본질을 잃지 않고, 나아갈 방향성과 가치관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며 더 나은 내일을 설계할 수 있지 않을까. 지켜야 할 것들을 버리고, 잃지 말아야 것들을 잊고, 우선경중을 헷갈리는 인생은 결국에는 목적은 잃고 목적지만 남는 초라한 여행이 돼버릴 수 있다.

바쁜 이들과 새것을 추구하는 사회는 지름길을 좋아한다. GPS처럼 목표를 위한 효율성만을 고려하고 과정이 생략된다. 과정이 생략된 결과는 의미는 물론 재미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목적만을 위한 삶은 현재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방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 사회에 짙게 물든 이들은 종종 길을 잃어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낯설고 외딴 마을은 GPS 없이 헤맨 뒤에야 벗어날 수 있다. 우리가 삶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그러면서 현재의 순간순간과 현실을 저항 없이 순순히 받아들이며 깨닫게 된다. 인간이 얼마나 취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인지를.

잃어버림에는 가르침이 있다. 새로 산 휴대전화든 어렸을 때 키우던 금붕어든, 잃어버리면서 우리는 배운다. 세상은, 우주는 나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돌아간다는 진실을. 사라진 것에 집착하지 않아야 심하게 아프지 않는다는 지혜를. 그래서 나는 상실이란 삶에서 예측할 수 없이 도사리는 비극에 대비한 훈련이자 성장이라고 믿고 싶다.

목적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바쁜 사람들은 마음보다는 머리로 소통한다. 그런 사람들은 마음으로 대화하는 훈련이 덜 될 수밖에 없다. 마음의 대화법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상실감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상실감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소통에 익숙하고 상실감으로 단련된 자들만이 인생이나 여행이 계획된 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예상치 못 한 일이 어느 날 갑자기 닥치더라도, 또는 잠시 길을 잃고 방황하더라도 큰 탈 없이 다시 자신을 추스르고 궤도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한참 전에 봤던 집과 골목이 다시 나타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기자기한 집들과 비밀스러운 골목들이 나를 여전히 헷갈리게 했다. 나는 말 그대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보물 지도도 없이 우연히 보물을 찾은 아이처럼. 산보란 나태함이나 빈둥거림이 아니다. 나 자신과 주변을 이해하고 발견하는 행위다.

내가 길을 다시 찾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보다는 다른 질문이 나를 긴장시켰다. 과연 트리니다드를 걸으면서 얻은 느낌과 생각을 잃지 않고, 잊지 않고 온전히 챙겨 간직할 수 있을까.

멀리서 다시 종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기괴한 영화의 반전처럼 자코메티가 다시 등장했다. 그리고 영리한 호객꾼은 나를 익숙한 목소리로 안내한다. “어디를 그렇게 급하게 가요? 시원한 칸찬차라 한 잔 마시고 가요.”

영화감독 정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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