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 영화천국] '엽기적인 그녀'의 숨은 1인5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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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어댑테이션'이라는 영화를 보니 니컬러스 케이지가 쌍둥이 시나리오 작가로 나오던데 1인 2역인가. 한 배우가 두 가지 역할을 한 영화들은 어떤 게 있는지 궁금하다.

A: 어차피 배우란 직업이 남의 인생을 대신 사는 것이긴 하지만 한 영화에서 두 가지 역할을 한다는 건 웬만한 용기와 재주 없이는 힘들다. 1인 2역을 아무에게나 시키는 것도 아니다. 1인 2역을 한다고 출연료를 '따블'로 쳐주는 것은 더욱 아니다. 사서 고생하는 거다.

정신 건강에도 별로 좋을 게 없음은 물론이다. 배우가 뭐 마징가 제트의 반남반녀 아수라 백작도 아니고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의 자아분열적 캐릭터 골룸도 아닌데 한 영화에서 이거 했다 저거 했다 하기가 쉽겠는가.

'어댑테이션'의 니컬러스 케이지는 이 난이도 D급의 1백80도 모드 변환을 훌륭히 해냈다. 안 그래도 소심한데 시나리오 각색이 맘대로 되지 않아 불안에 시달리는 형 찰리와, 가진 건 배짱과 넉살 뿐이지만 결국 할리우드 인기 작가 대열에 들어서는 동생 도널드를 마치 서로 다른 배우가 하는 양 시치미 뚝 떼고 연기한다. 만약 그가 올 초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탔더라면 아카데미상 최초로 1인 2역을 한 배우에게 상이 돌아가는 기록이 수립됐을텐데 아깝게도 후보에 그쳤다.

그런데 1인 2역 따위는 우습지도 않다는 배우가 있으니 바로 지난해 개봉한 '오스틴 파워 골드멤버'의 마이크 마이어스다. 1인 4역을 했다. 주인공 오스틴 파워와 그의 숙적 닥터 이블은 물론, 혐오스럽게 생긴 팻 바스타드와 그 못지 않게 짜증스럽게 생긴 악당 골드멤버까지. 분장술의 개가이기도 하지만 마이어스의 물 오른 연기발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시도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니 비디오 볼 때 참고하시라.

배역의 숫자만 놓고 따졌을 때 마이크 마이어스가 '형님-'하고 고개를 조아릴 배우가 한국에 있다. '엽기적인 그녀'에 출연했던 김일우다. 단역이긴 하지만 자그마치 1인 5역이다. 견우(차태현)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엽기녀(전지현)를 데리고 간 여관 주인 아저씨로 얼굴을 비추기 시작해 유치장 조폭.역무원 등 다섯 번이나 각기 다른 역으로 등장한다.

최근 할리우드에는 '1인 1백역'을 한 배우가 출현해 주위를 놀라게…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 네오(키아누 리브스)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던 스미스 요원(휴고 위빙)은 지난 주말 개봉한 '매트릭스2 리로디드'에서 1백명으로 늘어난다. 휴고 위빙이 '1인 다역'의 역사를 다시 쓰나 싶었더니 1백명 중 13명만 진짜 배우이고 87명은 컴퓨터 그래픽이 만들었단다.

형(오빠)과 누나(언니)들을 위한 보너스. 정말 깜짝 놀랄 만한 1인 2역을 추천한다. '질투는 나의 힘'에서 두 남자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성연 역의 배종옥인데,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가 돼야 그녀가 또다른 역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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