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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트 드라이버 → 레이싱카 선수 → 대학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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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자동차 테스트 드라이버에서 레이싱 선수를 거쳐 대학 강단에 서고 있는 박정룡(46)씨는 우리나라 모터 스포츠의 산 증인이다. 그가 출전한 자동차 경주대회는 모두 국내 최초의 행사였고 그는 첫 우승자였다. 9월에는 아주자동차대학(모터스포츠 전공)에 교수로 부임했다.

박 교수는 국내 모터스포츠가 태동한 1987년부터 2003년까지 프라이드.콩코드 등을 타고 전국자동차경주대회 등 국내외 대회에서 40여 차례나 우승을 차지했다. 그가 드라이버로 발을 내딛은 것은 고등학교 졸업 직후인 82년 기아자동차에 입사하면서부터다. 그는 당시 사령장을 받아들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발령부서가 공장이 아니라 이름마저 생소한 '중앙기술연구소 실험팀'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 자동차 업체의 기술 수준은 외국 기계를 겨우 조립하던 단계라 주행시험장이 없었다.

그는 "기아차 경영진이 국산차 개발을 염두에 두고 먼저 테스트 드라이버 양성에 나선 것"이라며 "입사 초기엔 회사 근처 비포장 도로에서 달려보는 게 고작이었다"고 했다.

박 교수는 85년 일본에서 본격적인 운전 기술을 익혔다. 기아차가 프라이드를 생산하기로 정하고 그를 일본 히로시마(廣島) 주행시험장으로 보낸 것이다. 여기서 보낸 2년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제대로 만들어진 서킷에서 맘껏 코너링과 브레이킹 등 고도의 운전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귀국 후 월등한 운전 기술로 자동차 경주대회가 열리기만 하면 우승은 그의 차지였다. 하지만 해외대회 참가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는 88년 한국인 최초로 참가한 '파리-다카르' 랠리를 잊을 수 없다고 한다.

"랠리가 무엇인지도 몰랐어요. 가서 보니까 사막을 횡단하는 것이더군요. 아시아자동차에서 만든 군용 지프를 개조해 출전했는데 일주일 만에 고장나 경기를 포기했습니다."

90년엔 기아차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레이싱에 뛰어들었다. 95년 호주에서 열린 '월드랠리참피온십(WRC)'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경주용 차량이 아닌 양산차 부문에 세피아(1600㏄)를 타고 출전했다. 문제는 레이스 상황을 알려주는 보조운전자를 구하는 것이었다.

"첫 출전이라고 했더니 아무도 동승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실력을 보여줬더니 호주인 한 분이 보조운전자로 나서더라구요. 그리고 정말 기적처럼 우승을 해버렸습니다."

이런 경력으로 그는 2000년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국제드라이버라이선스(A등급)'를 따냈다. 이후 2년간은 금호타이어의 지원을 받는 '금호 엑스타팀' 주전 드라이버로 일본 수퍼다이큐(耐久)시리즈에 참가해 여러 차례 입상했다. 이달 초에는 일반 운전자를 대상으로 한 안전운전 교습서인 '베스트 드라이버로 가는 길(오토북스)'도 펴냈다.

박 교수는 "한국이 자동차 생산 세계 6위권으로 부상한 것과 걸맞게 모터스포츠도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며 "후배들은 세계 최고봉 레이스인 포뮬러1(F1)에 참가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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