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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프랑스 정착의 선구자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79년 봄, 행색이 초라한 50대 후반의 C씨가 파리의 한인회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고국에서 초청들을 한다던 데…한번 가보고 싶어서…』한국말과 프랑스 말을 섞어 더듬댄 그는 두 나라말이 모두 서툴렀다.
6·25때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프랑스군에 묻어 인천에서 군 수송선을 타고 프랑스에 온 C씨는 그 후 외인부대에 취사병으로 입대, 프랑스식민지였던 베트남과 알제리 등을 전전하다 70년초에 제대했다.
파리의 중국식당 주방 일로 생계를 꾸린다는 그는 프랑스 국적이면서도 변영태 외무장관 이름이 적힌, 도불 때 발급 받은 한국여권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한인회사무실로 쓰던 한국식품점 「아리랑」 의 간판을 보고『아리랑』 하며 눈시울을 붉혔던 C씨는 이날 이후 한인사회에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불현듯 고국에 가보고. 싶은 충동에서 한인회를 찾았으나 천애고아인 자신의 처지둥을 생각해 모국방문 노력을 포기한게 아닌가하고 당시의 한인회 관계자들은 회고하고 있다.
전 한인회장 정준성씨에 따르면 50년대 초에 내불했던 C씨 등에 앞서 이봉수 노인과 「전영감」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육상선수로 참가했다가 경기 파리에 눌러 앉았다.
전씨는 프랑스여인과 결혼, 식품점 등을 경영하며 7O년 초까지 만해도 한인사회에 자주 나타났으나 요즘은 연로한 탓인지 모습을 볼 수 없다. 오래된 교민들 사이에서 전영감으로만 불리던 전씨는 나치군이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레지스탕스운동에 가담했으며 그 인연으로 프랑스인들의 도움을 받아 파리의 번화가 샹젤리제 부근에 차이나타운이란 중국음식점을 낼수 있었다고 한다.
서울서 S고교와 S대 정치학과를 나온 뒤 50년대 말 파리에 유학왔던 Q씨(50) 는 한때 재불 한인중 가장 큰 돈을 벌었던 인물로 꼽힌다.
평북출신의 Q씨는 수학 후 사업가로 나서 사우디아라비아의 무기재벌 「카쇼기」와 선을 대고한국의 중동통으로 자처했다.
박정희대통령시절 정부실력자의 후원을 받고있다는 소문과 함께 「파리의 박동맹」 이라고까지 불렸던 그는 한국의 유수한 기업들의 대 중동 창구역할을 자청하거나 의뢰 받기도 했다.
언젠가 Q씨는 딸 생일잔치를 위해 「조지」5세 호텔의 연회장을 몽땅 세냈다.
샹젤리제가 근처의 이 호텔은 항상 아랍부호들로 붐비는 특급호텔 중의 하나다.
3m높이의 대형 생일케이크하며 초청손님들을 위해 입구까지 특별히 깔아놓은 붉은 카피트하며…. 이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Q씨는 초년 프랑스인 부인과이혼 ,탤런트출신의 한국여인과 재혼했으며 요즘은 주로 훙콩 쪽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울대 불문과출신의 임갑씨(60)는 이대강사·경기중 교사로 강단에 섰다가 66년 파리에 왔다.
68년부터 프랑스사람들에게 바둑을 가르쳐 온 임씨는 지금 파리의 렌가에 있는 트레 뒤니옹이란 카페2층에 기원을 차려놓고 바둑보급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프랑스의 바둑인구는 약5천명으로 매주 20∼30명 정도가 임씨의 기원을 찾고 있다. 한국기원으로부터 초단자격을 인정받고 있는 임씨는 프랑스국적을 취득, 「외젠·림」이란 이름으로 르몽드지 등 프랑스신문에 바둑의 동양철학적 배경 등에 관해 자주 기고하고 있다. 프랑스상륙은 좀 늦었으나 파리한인사회에서 「누구」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는 K라는 맹렬 여성이 있다(그녀의 이름은 서울서도 알만한 이는 안다).
대구명문 K여고를 나와 미스코리아에 뽑혔던 K씨는 월남경기가 한창일 때 사이공에 진출, 사업을 하다가 73년 파리에 왔다. 74년 말 유대계 프랑스인 S씨와 합작으로 한국식당이 하나밖에 없던 파리에 S라는 한국음식점을 냈는데 전통 실내장식으로 고급스럽게 꾸며진 이 식당은 그 후 많은 프랑스인을 고객으로 확보해 그게 번창했으며 얼마 전 K라는 무역회사를 따로 차려 상당히재미를 보고 있다고 한다.
한편 50년대 초에 내불했던 한국인 가운데는 현재 낭트대교수로 있는 고체물리학전공의 민선식박사, 파리7대학 한국어과 과장인 이옥교수 등 학계에서 자리를 굳힌 학자들이 있고 서양화가 이성자씨도 이맘때 파리에 왔다.
이 들보다 훨씬 앞서 1920년에서 30년 사이에 만주를 거쳐 시베리아 철도편으로 프랑스 땅을 밟았던 인사도 물론 적지 않다. 조병옥박사·공진항·김법린·백성욱씨 등이 당시의 파리수학파로 전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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