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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수 기자의 학창시절] 교육이 죽음의 계곡에서 벗어나는 방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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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빈슨 [사진 TED]

영화 '킹스맨'이 연일 화제였습니다. 영화와 더불어 클래식한 분위기의 남성 정장, 스타카토로 딱딱 끊어 발음하는 영국식 영어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죠. 귀족적인 매력을 발산해낸 주연배우 콜린 퍼스는 영국 신사의 대명사로 떠올랐습니다.

스크린에선 '킹스맨'의 콜린 퍼스가 신사의 자태를 뽐냈다면, TED 강연에서는 진짜배기 영국 귀족(Knight Bachelor)이기도 한 켄 로빈슨 경이 10여년 전부터 신사의 품격을 선보여왔습니다. 대개 TED 강연은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 과학 기술의 발전 등을 널리 알리는 내용으로 꾸며지기에, 화려한 프레젠테이션과 능수능란한 말솜씨 등이 관객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곤 하죠.

올곧은 영국 신사인 켄 로빈슨의 강연은 다릅니다. 시각적 자료는 전혀 없고요. 그의 퍼포먼스라고는 '웃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 '역시 웃는 건 어색해'라며 입술을 앙다무는 표정 정도가 가장 역동적인 표현 축에 듭니다. 그저 무대 중앙에 반듯하게 서서 예리한 눈빛으로 관객을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주제인 '교육'에 대해 얘기합니다.

신기한 사실은, 무미건조하기 그지없는 인상을 가진 그가 강연을 시작하면 1분이 채 안돼 관객들이 폭소를 터뜨리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3분쯤 지나면 박수 갈채가 터져나오죠. 그럼 켄 로빈슨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아직 12분이 남았다"고 당황스럽다는 듯 얘기합니다. 5분이 넘어가면 그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에 객석에선 자지러질듯한 폭소가 이어집니다. 그러다 10분쯤 지나면 관객들은 진지하게 고민하는 눈빛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15분, 그의 강연이 끝나면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가 쏟아집니다.

장황하게 켄 로빈슨의 이야기를 꺼낸 건, 그를 '발표의 왕자'로 소개하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영국에 살다가 미국으로 이주한 이 교육학자가 영국과 미국의 교육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해결책을 찾아나가려 애쓰는 부분이 우리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이를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어서 입니다.

가장 잘 알려진 그의 강연은 '학교가 창의력을 죽인다'입니다. 창의력의 다양한 의미를 밝혀내면서, "온몸으로 자극을 받아들이고 배우고 표현하며 사고하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면서 점점 허리 윗부분만 사용하게 되고, 나중엔 머리만 쓰다, 급기야 뇌의 한쪽만 쓰는 걸로 훈련되고 만다"며 공교육의 문제점을 짚어낸 부분이 인상적이지요.

제가 이번에 소개하려는 내용은 '학교가 창의력을 죽인다'보다 조금 더 최신 버전입니다. '교육이 죽음의 계곡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강연인데요. 미국에서 학교를 중퇴하는 학생이 60%에 달한다는 지적과 함께, 이를 막기 위한 정부의 노력과 예산 투자가 계속 되고 있지만 뭔가 방향이 잘못 되었다는 지적으로 시작합니다. 학교를 중퇴하진 않았지만,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학교 생활을 괴로워하는 아이들이 점점 더 늘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죠.

학교가 가르치고 배우는 일 자체에 집중하지 않고 시험 점수에만 관심있는 상황, 교육에 대한 모든 권한을 중앙 정부와 주 정부가 틀어쥐고 교사와 학생은 수동적으로 따라야 하는 현실을 꼬집은 부분에선, 정확히 우리나라의 교육 현장이 떠오릅니다. 교사가 재미있는 예화라도 하나 들려줄라치면, 날선 눈빛의 학생이 "그거 수능에 나와요?"라고 공격하는 게 우리 교실의 한 모습이니까요. 그는 이런 교육의 현장을 아무 생명이 살지 않는 '죽음의 계곡'에 비유합니다.

미국 LA에 살고 있다는 켄 로빈슨은, LA 북쪽에 있는 '죽음의 계곡'을 여러 차례 가봤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겨울에 이곳에 180㎜ 정도의 비가 내렸고, 이듬해 봄엔 꽃이 만개했다고 하네요. 그는 "죽음의 계곡은 죽어있는 게 아니다. 그저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흙 표면 아래 가능성의 씨앗들이 숨어 꽃이 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길 기다렸을 뿐"이라고 설명합니다. "학교 역시 명령과 통제, 지배적인 리더십에서 벗어나,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소중히 여겨주고 다양한 재능을 인정해주며 호기심을 자극해주는 유기적인 환경으로 바꿔준다면 우리가 상상하지 않았던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교육에 대한 이런 진지한 고민과 성찰도, 켄 로빈슨답게 재치 만점의 유머 감각으로 녹여내 객석을 웃음 바다로 만들어놓고야 맙니다. 본인은 시종일관 '같이 웃을까 말까'하다 입술을 꽉 다물며 어색하게 참아내는 표정이지만요. '킹스맨'의 콜린 퍼스보다 훨씬 멋진 영국 신사, 켄 로빈슨을 영상으로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강남통신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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