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으로 치닫는 중·일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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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동아시아의 양대 강국인 중국.일본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1972년 양국 수교 이후 지금처럼 냉랭한 시기는 없었다. 최근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3(한.중.일)'정상회의에선 한.중.일 3국 정상이 매년 따로 만났던 외교 관례까지 깼다.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를 끝까지 외면했다. 전문가들은 "감정 싸움에다 지역 패권 경쟁까지 더해져 단기간에 관계가 원상회복하기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 전방위로 확산되는 갈등 기류=일본 총무성은 21일 "내년 1월 9일 베이징(北京)에서 열릴 예정이던 일본.중국.한국 간 정보통신장관 회의를 연기한다는 통보를 중국 측으로부터 받았다"고 밝혔다. 이 회의는 2002년부터 매년 열려 차세대 인터넷 통신과 디지털 방송 분야의 협력 방안 등을 논의했다.

일 언론들은 또 "고이즈미 총리의 개혁 전도사이자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 강경파인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총무상의 중국 방문이 취소된 것도 정치 상황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강행에 대한 전방위 보복이란 설명이다.

일본 정부도 강경 자세로 맞받아치고 있다. 22일엔 중국 정부가 요구하고 있는 야스쿠니 대체 추도시설 건립을 위한 조사비를 내년도 예산안에 반영치 않겠다고 발표했다. 고이즈미 총리의 지시에 의한 것이다.

일 정부는 중국 위협론을 공공연히 거론하기 시작했다. 아소 다로(麻生太郞) 외상은 22일 중국 군사 동향과 관련, "이웃나라에서 10억명 넘는 인구와 원자폭탄을 갖고 국방비를 매년 두 자릿수로 늘리고 있다. 그 내역이 극히 불투명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안보에)상당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도쿄(東京)도는 21일 일본 최남단에 있는 오키노도리(沖ノ鳥.도쿄도 관할)섬의 주변 해역에 파견할 어업조사지도선을 건조하기로 결정했다. 이 섬은 배타적 경제수역(EEZ) 설정을 놓고 양국이 마찰을 빚는 곳이다. 일 정부는 주변 40만㎢의 해역을 자국 EEZ라고 주장하나 중국은 "오키노도리 섬은 바위일 뿐"이라며 이를 인정치 않고 있다.

◆ 강경 자세 꺾지 않는 중국 지도부=중국 세계신문보(世界新聞報)는 21일 "중.일 관계가 빙점(氷點)에 이르렀으며 관계 회복에는 상당한 곤란이 따를 것"이라고 보도했다. 왕이(王毅) 주일 중국 대사가 ▶건강상의 이유▶업무 보고를 명분으로 12일 돌연 귀국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다. 외교부에서 일본통으로 평가받는 왕 대사는 설날 전까지 중국에 머물 것으로 보인다. 주일 대사의 휴가 치고는 이례적으로 길다. 그래서 "중국 정부가 일본에 대해 더욱 냉정한 정책을 구사하려는 조짐"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중국 지도부는 고이즈미 총리의 뒤를 이을 차세대 지도자 모두 과거사 문제에 우익 일변도의 성향을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양국 간 대립에는 아시아 지역의 패권 경쟁을 의식한 측면도 있다. 중국신문주간(中國新聞周刊)은 최근 "일본이 '아세안+3'정상회의를 통해 중국에 지역 주도권을 잡으려 한다는 혐의를 씌워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잡지는 이어 "고이즈미 총리는 중.일 관계 악화가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다"며 "그러나 외국 전문가들은 양국 갈등이 지역협력의 전반적인 구도에 지장을 줄 수준으로 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베이징.도쿄=유광종.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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