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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믿음] 원영스님 "작은 실수가 마음을 열게 한다"

중앙일보

입력

요즘 부쩍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깜빡깜빡 한다. 그럴 때마다 도반스님은 우스갯소리로 냉장고 문을 열어보라며 놀려댄다. 하루는 그 말에 보란 듯이 웃으면서 냉장고문을 열었는데, 정말 그 안에 찾던 물건이 있어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아니 이럴 수가. 웃어넘기긴 했지만 나름 속이 상했다. 어떨 때는 어느 장소에 가서 ‘내가 여기 왜 왔지’라고 생각할 때도 있고, 전화기를 손에 들고도 전화기를 찾아 두리번두리번 할 때도 있다.

어릴 땐 이 모든 것이 그냥 남의 얘기인 줄로만 알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아무리 일정이 많아도 시간표시만 해두고 따로 내용을 적어두지 않아도 별 탈 없이 늘 소화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최근 들어 믿었던 머리에게 자꾸만 배신당하는 느낌이 든다. 역시 나이는 못 속이는가 보다. 그래서 방송 중에 ‘건망증’ 얘기를 한번 해보았다. 그랬더니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청취자들로부터 격하게 공감하는 사연이 쏟아졌다.

“스님, 저는 차 위에 운동화 말려놨다가 그냥 운전하고 나갔어요.” “차 몰고 은행 갔다가 볼 일 보고 집에 걸어왔네요, 글쎄. 차 분실신고 할 뻔 했어요.” “저는 김치 담그려고 풀 쒀놓고 설거지하다가 그냥 버려버렸답니다.” “화물기사인데요. 화물은 고객 동승이 거의 없는데, 어느 날 고객을 동승하고 휴게소에 들렀다가 고객을 휴게소에 두고 혼자 온 적이 있습니다.” “스님, 저는 휴대전화를 가지고 간다는 것이 집 무선전화를 들고 외출했지 뭐예요.” “뒤뜰에 고추 말리러 나간 사이에 남편이 문 잠그고 나가서 베란다 창문으로 간신히 들어왔어요. ” “문 열고 열쇠를 꽂아둔 채 하룻밤 자고 일어나서, 오후에 외출할 때 얼마나 진땀나게 찾았는지요.”

이렇게 재밌고도 아찔한 일화가 넘쳐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나같이 모두에게 웃음을 전해주었다. 황당하면 황당할수록 웃음의 농도는 더욱 진해졌고, 그 유쾌함으로 인해 더불어 행복해졌다. 문제가 생겼을 당시 본인은 정말 속이 탔겠지만, 지나놓고 보니 그때의 당혹스러움이 오히려 더 짜릿한 여운을 남겼던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시간도 제법 흘렀고, 당시의 상황을 바라보는 이 또한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교훈처럼, 더러는 슬프고 짜증나는 일도 한 생각 돌이키면 이렇게 쉽게 편안해지는 법인가보다.

어쩌면 평소 너무 열심히 살다가 생긴 실수여서 더 그런 지도 모르겠다. “행복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어깨에 내려앉는 나비와 같다”고 한 미국작가 나대니얼 호손의 말처럼, 행복은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인생의 부산물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 어떨 땐 작은 실수가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만드는 것 같다. 행복을 위해 살고자 하면 행복과 멀어지지만, 하루하루 충실히 살다 보면 어설픈 실수가 도리어 행복이 되어 찾아오기도 하니까. 그러니 행복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빠져 스트레스 받을 일은 아니다. 행복과 불행에 너무 개의치 말고 그냥 뚝심 있게 살아가면 그뿐이지 싶다.

그나저나 앞으론 메모하는 습관을 좀 더 길러야겠다. 머리를 믿을 수도 없을 뿐더러, 세월을 이길 수는 더더욱 없을 테니 말이다. 『중용』에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至誠無息) 했던가. 나이 들수록 하루하루 정성스레 살아가는 것 말곤 길이 없나보다. 가끔은 황당한 실수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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