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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국회] 농민들의 '폭력 시위'에 대한 조그만한 변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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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1944년 1월 44개 연합국 대표들은 세계의 경제대공황과 악화된 국제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브레튼우즈협정을 맺었습니다.

이 협정에 따라 안정적인 외환시세를 유지하기 위해 IMF(국제통화기금) 설립과 미국의 주도로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를 조인하였습니다.

그리고 1986년 9월 우르과이에서 뉴라운드의 출범을 알리는 각료 선언이 채택되었고 이러한 뉴라운드 출범은 바로 쌀시장 개방에 대한 엄청난 압력과 한국 농업의 위기를 예고하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우루과이라운드에서 가장 어려운 교섭이 바로 농업문제였고, 교섭 전체의 성패를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대상이며 또한 교섭의 초점도 각국의 국내농업정책의 규제라는 문제로 모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습니다.

당초 ’90년말까지 농산물 ·용역 등 15개 분야의 협정체결을 목표로 ’93년 타결되어 ’94년 4월 각국 대표가 UR 최종의정서에 서명함으로써 UR협상은 종결되고 GATT를 계승한 새로운 세계무역기구(WTO)가 ’95년 공식 출범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87년 어느 날, 군생활의 절반을 넘기고 정기휴가를 나왔던 때가 떠오릅니다.

당시 우르과이라운드에 따른 농민들의 걱정과 우려는 농지의 가격폭락이란 상심으로 이어져 긴 한숨과 줄담배를 태우시던 아버지의 초췌한 모습을 통해 저는 생생하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그때와 비교하여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하시는 제 아버지는 이제 칠순을 훌쩍 넘기시고 오랜 세월의 기다림에 지쳐 피곤한 모습이 너무도 역력해 보이십니다.

지난 20년 동안에 아무런 조치도 못한 무능한 정부에 분노하면서도 장남인 제가 경찰관이기 때문에 시위현장에도 못 나가시는 안타까운 심정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분노한 농민들과 그분들의 과격한 표현도 잘 알고 이해합니다.

지난 달, 쌀시장 개방 국회비준을 반대하며 여의도 집회에 참가하셨다가 안타깝게도 사망하신 故전용철님과 故홍덕표님께서도 우리 부모님처럼 한평생을 그저 땅만 믿고 열심히 살아오신 농민들이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글을 통해 다시 한번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분의 희생을 놓고 지난 수 십 년 동안 되풀이해온 폭력시위와 과잉진압에 대한 책임공방이 재연되고 있어, 이번 사고를 통해 평화적인 집회․시위의 정착을 위한 계기로 삼고자 이 글을 씁니다.

지난 42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저도 군사독재정권의 타도를 외치며 전투경찰을 향해 돌맹이를 던졌고, 또한 반대편에서 날아온 돌맹이에 머리가 깨지면서도 당당하게 ‘자유’와 ‘민주’ 그리고 ‘통일’을 외쳐도 보았습니다.

심지어는 전경으로 복무하는 절친한 친구를 면회하면서 그 친구가 전경의 고충을 하소연할 때, 태어나 처음으로 친구간의 우정에 거리감을 느껴보기도 하였습니다.

그 친구가 제대 말년에 경찰로 입직하겠다고 말할 때는 우정을 걸고 반대하였는데... 현재 그 친구는 지방 某여고의 국사교사로 근무하며 전교조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당시 월간지 기자였던 제가 경찰에 입문하겠다고 말했을 때, 이번에는 그 친구가 강하게 반대하였지만 저는 입장이 바뀌지 않았고 어느새 15년이 흘렀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입장이 다르다는 말처럼 같은 형상을 놓고도 저마다 관점을 달리 해석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폭력시위나 과잉진압에 대한 시각이나 책임만큼은 좀 더 냉정하고 진지하게,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집회시위는 시위대의 생계가 걸린 문제일수록 그만큼 감정은 격화되고 거친 행동으로 표출됩니다.

그래서 최근 농민들은 국회 비준 반대가 그만큼 절실했고 이를 제지하는 경찰관들에게 그만큼 감정적이고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가장 냉정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끝까지 인내해야할 전투경찰도 젊은 전경 대원들이다 보니 젊은 혈기 때문에 흥분하여 과잉진압으로 변질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시위현장에서 지휘관들이 겪는 가장 어려운 상황은 바로 부대의 피해를 당한 후에 흥분하는 부대원들의 인내를 끝까지 유지시켜야 하는 부담입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경찰은 전경대원들의 인내심을 높이기 위해 인권교육과 책임의식을 강화하여 앞으로 과잉진압을 철저히 예방한다고 합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이 땅의 시위현장에서 경찰과 시위대는 양측이 폭력시위와 과잉진압으로 상호 공방을 벌이다가도 어느 한쪽에 사망자가 발생하면 이를 최대한 자신들에게 유리한 기회로 활용해왔던 점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경찰은 암울했던 시대에 처절한 민주화운동의 시위현장에서 희생된 특히, 87년 이한열 열사와 91년 강경대 열사의 죽음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집회시위의 가장 숭고한 가치인 ‘비폭력 무저항운동’을 포기하고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선택했던 폭력시위가 비록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정권과 시대가 바뀐 지금도 시위대의 질서를 유지해야할 주최측 질서유지인의 역할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있는 현실은 분명 폭력시위가 남긴 폐해입니다.

단지 예전에는 불법시위용품을 집회 전에 반입하다가 요즘에는 집회시위 도중에 보급하는 방법으로 경찰검문을 피하는 운반방법외에 달라진 것은 거의 없으며 가장 당당해야할 시위자의 얼굴은 미리 준비된 화염병, 죽창, 쇠파이프를 손에 들면서 미리 준비한 복면과 마스크로 가려버립니다.

이러한 현상은 통상적으로 평화시위를 약속하고 집회신고를 한 후에 불법시위용품을 미리 준비하여 결국 폭력시위로 변질시키는 가장 큰 원인입니다.

헌법에 보장된 평화적인 집회․결사의 자유는 국가가 반드시 보장해야할 의무입니다.

그러나 시위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경찰을 국가공권력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단순히 ‘비무장 시민을 진압하기 위한 무장한 경찰’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집회시위현장에서 무장하지 않은 경찰이 폭력시위를 해산하거나 진압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이번 경찰의 과잉진압과정에서 사망하신 두 분의 사망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책임이 반드시 뒤따라야 하고 아울러 폭력시위에 대한 책임과 처벌도 법에 따라 강력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또한 앞으로 진압경찰이나 시위대 모두가 폭력시위와 과잉진압을 방지하기 위해 경찰관이나 전경은 소속과 이름을 진압복의 전후에 표기하고, 집회시위 주최측에서도 불법시위용품의 반입을 스스로 차단하고 질서유지인의 역할을 강화하여 시위대 스스로 평화시위를 확보해야 합니다.

경찰과 쌀 수입 협상은 아무런 관계도 없고 어떠한 책임도 없으며 단지 시위 현장에서 빚어진 불행한 결과에 대하여 철저한 수사를 통하여 책임소재를 규명해야지, 결코 악화된 여론을 무마할 정치적 목적으로 법으로 임기를 보장한 경찰청장의 책임까지 확대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이번 시위의 가장 큰 원인은 20년이란 기간을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비하지 못한 정부의 농업정책 실패에서 기인했음은 반론의 여지가 없기에 이에 따른 가장 큰 책임은 지난 20년 동안 한국농업를 방치한 역대 집권당(민정당 => 민자당 => 신한국당 => 새천년민주당 => 열린우리당) 모두에게 물어야 합니다.

아울러 폭력시위든, 과잉진압이든 이제 그 어느 쪽이든 시대를 역행하면 그 책임과 처벌을 엄정하게 묻는 지극히 정상적인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디지털국회 오상욱]

(이 글은 인터넷 중앙일보에 게시된 회원의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중앙일보의 논조와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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