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17. 동양이 본 개화기 조선-박노자 교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개화기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같았던 이유는 변화에 대응할 우리의 힘을 키우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이와 함께 조선을 발판으로 도약하려 했던 주변국의 이해관계도 계산해야 할 것입니다.

'동양 속의 서양'을 지향했던 일본에 대해 박노자 교수는 마치 서양이 동양을 비하하듯이 일본도 조선과 중국을 비하했다고 말합니다. 오리엔탈리즘의 일본식 버전인 셈입니다.

한편 허동현 교수는 소위 '국제적 연대'를 내걸었던 당시 중국과 일본의 사회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조차 조선의용군 등을 자신들의 목적에 활용한 혐의가 짙다고 지적합니다. 중화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이 횡행했던 한 세기 전 한반도의 모습입니다.

'발전'에 도취된 서구는, 비서구 사회를 늘 정체돼 있고 발전할 수 없는 '산 시체''불구자''병자'로 그리면서, 언어 폭력을 통해 식민화의 물질적 폭력을 합리화하였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와 같은 상징적 언어 폭력에 '오리엔탈리즘'이란 명칭을 붙인 바 있지요('오리엔탈리즘', 1982). 19세기 말 서구의 서적에 묘사된 '허약하고 비현실적인' 인도의 성직자나 '비겁한 음모만 꾸밀 줄 아는' 중국 사대부 등의 표현에는 오리엔탈리즘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서구 체제에 편입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메이지 시대 일본 지식인들은, 서구인의 빈축을 사는 '혼욕(混浴)'같은 풍속을 금지하는 등 오리엔탈리즘의 칼을 피하려고 노력 했습니다.

그들은 또 다른 한편으로 '진보적인 일본'과 '퇴보적인 아시아'가 완전히 다른 존재임을 강조하면서 이웃인 중국과 조선을 멸시당해야 할 '오리엔트'로 묘사했습니다.

오리엔탈리즘으로 중국이나 조선을 짓밟자고 하면서, 자신들은 '준(準)서구인'으로서 세계 체제로의 편입을 도모한 셈입니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4~1901)가 '탈아론'(脫亞論:1885)에서 말한 대로, "혹시 우리의 땅이 지나.조선과 인접한 이유로 서구인들이 우리를 지나.조선과 동일시"할까봐, 일본의 '다름'을 애써 강조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의도는, 메이지 시대의 대륙에 관한 저술에서 선명하고 일관되게 드러납니다.

"동해의 후미진 구석에 침체된 한 야만국"('近時評論' 1876년 6월 24일), "조선 인민을 위해서라도 빨리 멸망하여 문명국의 관리 밑에 들어가야 할 야만적 정부의 나라"(후쿠자와 유키치, 1885), "한국은 봉건제도로도 진보하지 못한 고대 사회일 뿐이고, 그 민족적 특성은 부패와 쇠망이다"(훗날 마르크스주의자로 이름을 날린 경제 사학자 후쿠다 도쿠조, 1904), "한국인들은 여성처럼 나약하며 그 나라는 어차피 죽어가는 나라일 뿐이다"(일본적 개인주의를 제창했던 기독교 지식인 니토베 이나조, 1905), "유교의 영향으로 발전이 상당히 지체된 조선 사회는,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없었다면 자본주의로 이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일본에서 한국 경제사의 최고 전문가로 꼽혔던 시카다 히로, 1933) 등등.

이는 침략의 선전꾼도 극단적 국수주의자의 말도 아닌, 당대 일본에서 '최고의 지성''자유주의자'로 인식됐던 사람들이 한 말입니다. 이들이 '일본형 오리엔탈리즘'의 틀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현실은, 메이지 시대 일본이 추구했던 근대성의 천박함과 모방성만 보여줄 뿐입니다.

19세기 유럽인들은 과거 유럽에 문명의 은혜를 베풀었던 이슬람 문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럽식의 발전 지향적인 봉건제나 자본주의가 자생적으로 배태될 수 없는 완고한 세상"이라고 말입니다.

메이지 지식인들 역시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과거 일본의 스승이기도 했던 한국의 '정체성'과 '타율성'을 만들어낸 것이지요. 오리엔탈리즘의 공격을 받기는 중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량치차오(1873~1929)와 같은 개혁파 논객들도 서구와 일본의 경멸어린 시선 속에서 중국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조선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 곧 '종주국으로서 중국의 위상'을 강조했지요.

그러나 관념상의 '종주권'문제와 무관하게 중국 근대의 인사들은 개인적 교제 차원에서 한문으로 필담이 가능한 한국 선비들을 동등한 지식인으로 간주하여 따뜻한 우정을 많이 보였습니다.

일본에서도 자국의 제국주의를 부정한 공산주의자나 아나키스트뿐 아니라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1893~1961)와 같은 온건 기독교적 자유주의자들도 일제의 동화정책이나 식민지 약탈을 비판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였지요.

그러나 많은 조선인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야나이하라와 같은 신앙인도, 일본 자본주의의 성장을 '진보'로 파악하고 남양 (南洋)의 '미개인'들을 일본이 '보호'한다고 주장하는 등, 근본적으로는 서구적 자본주의 긍정론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사진 설명 전문>
청일전쟁(1894년) 개전 소식을 듣고 술렁거리는 서울 거리 외국인들의 모습. 당시 프랑스 신문 ‘르 프티 파리지안’(1894년 8월 13일자)에 실린 삽화다.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우세가 일본의 우세로 역전될지 등을 포함해 조선의 운명과는 관계없이 자기들의 이익을 셈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