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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파일] 실험실의 쥐와 인간은 다르다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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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영화는 다양한 분야에 활용된다. 역사적 사실이나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라면 당대의 정치사회사를 논할 때 보조자료가 되곤 하고, 범죄를 다룬 영화라면 쫓는 자와 쫓기는 자 모두에게 참고가 되기도 한다. 소소하게 보면, 로맨스물은 실생활의 연애지침으로도 응용이 가능하다.

사실 이런 분류에 속하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영화가 가장 풍부하게 사례를 제공하는 분야가 있다. 바로 인간의 심리와 행동양식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인간행동에 대한 연구결과를 영화가 적극적으로 차용한다면 어떨까. 프랑스 누벨바그 운동의 주역 중 하나인 알랭 레네 감독의 1980년작'내 미국 삼촌'(23일.서울 시네큐브 개봉.사진)이 이런 경우다.

줄거리만 요약하면 여느 통속극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유한 인텔리 출신으로 방송사 국장에 오른 장(로저 피에르)은 유부남이면서도 연극배우 자닌(니콜 가르니에)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자닌은 거짓말에 속아 장을 떠나고, 직업도 옷 공장의 디자이너로 바꾼다. 한편 시골출신으로 자수성가한 르네(제라르 드파르디유)는 회사의 새 경영방침에 적응하지 못해 좌절하다 이 공장으로 좌천된 상태다. 급기야 자살까지 시도하는 르네의 모습을 목격한 자닌은 뒤늦은 깨달음으로 장을 찾아가 사랑을 돌이키려 한다.

새로운 것은 형식이다. 영화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세 사람의 인생사가 전개되는 사이사이, 전문가의 내레이션과 실험실의 쥐들을 등장시켜 이들의 행보를 동물의 행동양식에 대입시킨다. 실험실 장면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주기적으로 전기충격을 가하는 방안에 함께 갇힌 두 쥐의 반응이다. 도피처를 찾지 못한 쥐들은 서로 격렬하게 싸우는데, 이 싸움 덕분에 스트레스의 상당 부분이 해결된다는 설명이 곁들여진다. 결국 세 인물이 드러내는 행동 역시 누군가에게 스트레스를 전가하는 방식을 포함해, 다양한 도피처를 찾아 자신의 스트레스를 덜어내려는 행동으로 풀이된다.

또 하나 재미있는 형식은 세 인물이 겪는 격렬한 심리상태에 상응하는 무성영화의 장면들이 그때마다 삽입되는 점이다. 예컨대 르네가 직장내 지위에서 위협을 느낄 때의 표정은 프랑스 고전스타 장 가뱅의 흠칫하는 표정과 교차된다. 이런 화면조합을 보고 있노라면, 등장인물이 겪는 심리적인 고통 역시 절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사회에 정형화된 반응방식의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만들어진 지 25년 만에, 단관개봉으로 국내에 첫 소개되는 이 영화를 대중적으로 권하기는 사실 망설여진다. 하지만 100여 년 역사에 불과한 영화라는 장르가 자신만의 표현방식을 얼마나 다양하게 개발해왔는지 관심이 있다면 얘기는 다르다. 물어뜯고 뜯기는 우리네 일상을 잠시 실험실 안의 쥐를 보듯 관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영화 속의 전문가는 실제 외과의사 출신인 행동과학자 앙리 라보리다. 감독의 그의 저서에서 영감을 받아 이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의 제목은 미국으로 이민 간 삼촌이 느닷없이 나타나 막대한 유산을 물려준다는 식으로, 막연한 희망을 의미한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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