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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공포의 엔저 쇼크, 한국 경제 마비시킬 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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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일본 돈값이 마침내 100엔당 800원대로 떨어졌다. 정부가 마지노선으로 여겼던 900원 선은 28일 속절없이 무너졌다. 원-엔 환율이 800원대로 떨어진 것은 7년2개월 만이다. 최근의 ‘엔저 쇼크’는 한국 경제의 최대 위험요인이 되고 있다. 엔저가 올해 한국의 성장률을 2%대로 끌어내릴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번 엔저는 과거와 많이 다르다. 우선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 일본 돈에 견준 원화가치는 아베노믹스가 본격화한 2012년 6월부터 2년11개월 새 68%가 절상됐다. 일본과 글로벌 시장에서 숙명처럼 맞붙고 있는 우리 기업 입장에선 대처할 시간이 그만큼 없었단 얘기다. 자동차·선박·석유화학…. 우리의 주력 수출 품목들은 이미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올 1분기 수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8%나 줄어든 것도 엔저 쇼크 탓이 컸다.

 둘째, 이번 엔저는 일본 정부의 의도적인 노림수의 결과다. ‘근린 궁핍화’란 비판에도 불구하고 무제한 돈 풀기로 만들어 낸 엔저다. 일본 수출이 살아나는 만큼 경쟁 관계인 한국 수출이 쪼그라들 수밖에 없는 구조다. 셋째, 일본의 국가 신용등급 하락으로 엔저의 구조적 장기화 조짐이 뚜렷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당분간 양적완화 조치를 중단할 기미가 없다. 이런 추세가 이어지면 내년엔 원-엔 환율이 800원대를 밑돌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일각에선 기업들이 언제까지 환율에 의존할 것이냐며 기업 경쟁력 강화를 주문한다. 백번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 문제다. 환율 변동 폭이 요즘처럼 상궤를 벗어났을 땐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급속한 엔저 쇼크는 이미 특정 기업·산업을 넘어 수출·관광·소비 등 우리 경제 전반에 깊은 주름을 만들고 있다.

 한국은행과 정책 당국은 수단이 없다는 말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대규모 통화정책으로 맞불을 놔야 한다. 금리 인하를 포함해 모든 수단을 짜낼 때다. 좌고우면하다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 급속한 엔저 쇼크가 우리 경제를 마비시킨 뒤에는 백약이 무효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