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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옥토로 바뀐「철의 삼각지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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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겨레가 둘로 갈려 피흘렸던 34년전 비극의 그날 6 ·25일.
형제의 심장에 터뜨리던 포화를 「휴전」이란 이름으로 멈춘지도 31년.
포탄에 찢기고 피로 물든 산하에도 다시 꽃은 피고 천둥은 울어 강산이 세번 바뀌는 세월이 지났으나 그날의 상처는 겨레의 가슴속에 아물지 않고있다.
외래의 이념은 5천년의 핏줄을 가를만큼 진한것인가.
상잔의 비극, 이제는 모습조차 바뀐 그 아픔의 현장에서 다시6월을 돌이킨다.
『우리는 고향을 찾아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더 갈수가 없어 이곳에 단을 쌓고 통일의 그날을 기원한다』-.
검푸른 벼포기가 바람결에 눕는다.
사방 50리 빌로드의 벌판.
북녘을 가로지른 철조망 가에서 10리밖 고향을 응시하며 평강군민들이 세운 망향비가 오똑하다.
고개를 들면 아스라이 펼쳐지는 연봉.
원쪽부터 백마고지·피의 능선·김일성고지·하회산·발리봉·저격능선….
6·25의 그날 피아3만의 젊음이 맞부딪쳐 포탄으로 영혼을 찢고 총검으로 육신을 뭉개던 혈전의 싸움터, 한 맺힌「철의 3각지대」-.

<사방50리의 벌판>
이제 그 어느곳에도 그날의포연, 절규의 함성은 없다.
『모를 거꾸로 심어도 농사가 된다는 들판 아닙니까. 요음은 철원군쌀의 절반, 강원도쌀의 6분의1을 여기서생산하고 있읍니다』
강원도 철원군동송읍이평리이성윤씨(62) 는 그날의 격전지 철원평야가 이제는 전국에서 가장 앞서가는 농경지로 탈바꿈했다고 말한다,
밀고 밀리는 3년여의 격전속에 마을도 논밭도 모두 쑥대밭으로 변했던 철의 3각지대가 다시「쇠벌」(철원)옥토로 개간되기 시작한 것은 6·25의 포화가 멎고 6년이 지난 59년부터.
민통선북방월하리에 옛주민 72가구가 출입영농을 시작하면서다.
67년부터는 아예 「통선안에 집을 짓고 사는 입주영농이 시작돼 현재 14마을에 1천2백10가구가 6천4백69ha의 농토를 일구었다.
『초기에는 출입증을 받아 아침6시에 들어가 저녁8시면 나와야했고 곳곳에 부구 지뢰등 폭발물이 터져 희생자가 나기도 했지요. 땅을 파면 녹슨 철모와 백골이 함께 나와 6·25때 잃은 피붙이 생각에 통곡과 한숨을 삼키며 일을 했습니다. 지금도 저 검푸른 벼포기를 바라보면 젊은 육신들이 다시 피어나는 것갈은 착각을 느낄때가 있어요.』
초기 개척민의 한사람인 이씨는 붉어진 눈시울로 망연히 들판을 응시했다.
『농사를 지었다하면 1만평, 2만평입니다, 그래서 영농기계화가 어느곳 보다 빨랐지요.』
이평3리주민 박명운씨(50)의 말대로 이곳은 기계화 영농의 선진기지.
호당 경지면적이 전국평균(0·9ha) 의 2배 가까운 1·7ha나 돼 인력부족과 높은소득이 기계화를 부추겼다.
현재 14개마을 소유 영농기계는 트랙터가12대, 바인더가 80대, 콤바인이 11대, 이앙기는 10집에 한 대꼴이며 경운기는 없는집이 없다.
올해도 이들 농기계로 어느 곳보다 빨리 보리수확·모내기를 했다.

<담없는 부자마을>
경제적 여유에따라 주민들은 천막집을 흑벽돌집으로, 다시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고 동네입구엔 약방과 술집까지 들어서 휴전선의 코밑에 「도둑없고 담장없고 대문없는」복된 마을을 이루어 살고있다.
잡초밭으로 버려졌던 철원평야가 이들 농민들의 정성과 끈기로 해가 다르게 옥토로 변해가는 것을 보고 심술이 난 북괴는 이 들판을 적셔오던 평강고원아래 봉래저수지의 물길을 끊어버렸다.
70년의 일이다.
이때문에 한동안 물이 모자라 농사에 애를 먹기도했다.
72년부터 7개의 저수지를 새로 만들어 이젠 95%가 수리안전답.
『철원하면 예부터 쌀·명주·술이 명산이었지요. 한때는 읍내에 종업원이 2백여명이나 되는 제사공장이 둘씩이나 됐고 철원약주맛이 너무좋아 아예 고을이름을「주원」이라고 부르기도 했답니다』
6·25전 철원역에서 역무원으로 근무했던 김화선옹(74·철원군동송읍오덕리)은 그러나 옛 철원의 융성을 회상하면 지금의 철원은 옛날에 댈것이 못된다고 했다.
『어서 그날이 다시와야지요』
김씨가 기차를 타고 오르내리던 경원선철길은 민통선북방 2km에서 끊겨있다.
철길을 사이에 두고 동쪽은 개간됐지만 휴전선과 인접한 서쪽은 아직 버려져있다.
앙상한 기관차의 잔해가 잡초속에 바스러져가는 철길, 부근은 또 옛 철원벌의 중심이었던 철원읍의 폐허.
한때 북괴 노동당철원군당건물로 쓰였던 3층건물이 골격만 남아 6월의 햇살아래 비극의 증인인양 유령처럼 서있다.

<북축선전은 여전>
『왼쪽끝에 보이는 산이 바로6·25때 30여만발의 포탄세례를 받아 산높이가 lm나 낮아졌다는 백마고지입니다. 그뒤가 피의능선, 그뒤가 김일성고지….』
전선 최전방을 지키는 조효근소위(26)는 6· 25를 말로만 들은 세대.
그러나 아버지들이 피흘려 싸웠던 철의 3각지대 사연을 훤히 알고 있었다.
『요즘도 북괴는 납치해간 최은희-신상옥부부가 자진월북했다고 방송하는등 유치하고 터무니없는 선전선등에 여념이 없읍니다. 한심한동포들이지요. 언제나 제정신이 돌아올려는지….』
조소위는 눈앞을 가로막은 철책을 박차고 철령고개너머 흥남벌을 가로질러 동해가 끝나는 곳까지 내달리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번씩 치솟는다며 주먹을 불끈쥐었다.
잡초처럼 끈질긴 민생과 두려움을 모르는 젊음이 6월의 휴전선에서 만나고 있었다.<김재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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