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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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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먼 길
문수영

먼지를 닦아내고 허전함 걷어내고 그림을 걸기 위해 벽에다 못을 칩니다

아무나 가 닿지 못할 허공인 줄 모르고

버티는 벽 속엔 무엇이 숨어 있기에 번번이 내 마음 튕겨져 나오나요?

액자 속 망초꽃들은 우수수 지는데……

어쩌면 나 모르는 박쥐의 집이 있어 햇살에 눈이 부셔 창문을 닫은 걸까요

오늘도 몸 웅크리고 밤이 오길 기다리며

어둠 하나 보지 못한 그런 눈을 갖고서 날마다 겉모습만 꾸미고 살았으니

한 뼘도 안 되는 거리가 참 아득한 강입니다

비지땀 흘리면서 내일은 산에 올라 내 안에 흐린 안개 죄다 풀어내고 싶습니다

발 뻗고 누웠던 집이 상처위에 핀 꽃이라니!

*** 당선자 문수영씨 소감

늦깎이지만 지금부터 시작

정말 먼길이었다. 진창길을 지나기도 했고, 가시덤불도 있었다. 그 길에서 피었다 지는 수많은 꽃을 보면서 나는 날마다 애달픈 마음을 달래고 추슬렀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훌쩍 자라 성인이 되었고, 내 머리카락은 한 올 한 올 내 곁을 떠나갔다. 그동안 주위 사람들에게 너무 무심했다. 외길을 걸어오면서 누군가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는지도 모른다.

지금 솔직히 행복하다. 비록 늦깎이지만,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원 고전문학 수업에서 '청구영언'에 대해 고찰을 할 기회가 있었다. 막연하던 시조가 내 몸을 흔들었다. 그것은 그동안 내가 무심히 지나쳤던 꽃이었다. 이제 그 꽃이 제 향기와 빛을 탐스럽게 피워내도록 가꾸는 일이 남았다. 오랜 세월 묵묵히 지켜봐 준 가족에게 기쁨을 돌리고 싶다. 중앙일보와 심사위원님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 약력=▶1957년 경북 김천 출생 ▶80년 동덕여대 국문과 졸업 ▶2003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시 추천 ▶고려대 인문정보대학원 재학 중

*** 심사평

일상서 퍼올린 시상, 물 흐르듯이

오랜 논의 끝에 문수영의 '먼 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끝까지 검토한 임채성.윤경희.고춘옥.정행년.김대룡.한서정.이영숙 등의 작품은 당선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새로움이 덜하고, 음보의 파탄이 잦거나 이미지 중복 등을 보였다. 그에 비해 '먼 길'은 참신한 발상, 활달한 호흡이 돋보였다. 또한 전편이 서로 유기적인 길항 체계를 유지하면서 독백체의 적절한 진술과 비유에 힘입어 삶의 의미를 심화시켜 보여 주었다.

예컨대 그림을 걸기 위해 벽에 못을 치는 비근한 일상사를 밀도 높게 천착한 점과 시조 고유의 가락에 의도한 바를 처음부터 끝까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담아낸 형상 능력이 돋보인다. 또 신인으로서 완결의 미학에 근접한 기량과 안목을 갖추고 있다는 점도 신뢰가 갔다. 그리고 다섯 수 모두 초.중장을 각각 한 행이자 한 연으로 배열한 것과 끝수 종장의 결구는 인상적이다. 다만'내 안에 흐린 안개 죄다 풀어내고 싶습니다'에서 '죄다 풀어내고'와 같은 구절은 한 음보로서 가락이 순탄치 못하다는 점을 당선자나 그 밖의 모든 응모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형식과 내용의 절묘한 균형과 조화를 동시에 요구하는 시조 창작의 길은 지고지난한'먼 길'이다. 그런 만큼 '완벽'이라는 정상을 향해 당선자와 종심에 오른 이들 모두 가일층 분발하길 빈다.

<심사위원 : 박시교.이우걸.유재영.김영재.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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