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비구니상 모독이다, 창작자유다, 영화 「비구니」논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촬영중인 영화 『비구니』를 둘러싼 비구니스님들의 저지운동이 급기야 법정소송으로까지 번졌다 비구니상의 모독과 예술창작의 자유보장이라는 대립으로 팽팽히 맞서 있는 불교계 대 영화계의 참피온스핑크스의 수수께끼 같기만 하다. 아직 영화화되지도 않은 제작중의 영화 시나리오에 대한 문제라 좀 때이른 감이 있기도 하지만「정답」을 선뜻 찾기 어려운 평행선의 양측 주장을 모아본다 <편집자주>

<불교계입장>
나는 우리 학교의 젊은 비구니들의 수도생활 앞에 더이상 어두운 그림자가 깃드는것을 미리 막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몇마디 사회를 향해, 당사자들을 향해 애정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같은 동포들 사이에 내 식구. 남의 식구가 필요없는 그러나 바람직스럽기는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나무라고 먼저 타이르는 것이 순서이다.
그래서 나는 『비구니』 영화제작을 둘러싸고 법정소송까지 낸 비구니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그들도 지금 한창 조용히 희망에 부풀어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데, 아닌게 아니라 웬 청천병력이냐는 이야기였다.
좋은 예술을 주고 그 심성을 순화하며 인간사회의 허위와 가식을 척결하고 나아가 영원한 자연의 이법을 따라 인간들이 희망을 갖고 살수 있도록 고무하는 일은 바로 종교적이라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의 영화 시나리오와 그 제작구상을 보면 이것은 비구니들을 위하는 …그들의 수행을 존중하며 고무격려하고, 널리 그 이상을 기품있게 사람들에게 알려 이사회를 밝게 하려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들을 모욕하고 우스개거리로 만들고 있다. 도가 다 이뤄진 사람이 아니라 이제 마악 그 어려운 수행길에 들어선 그들이 나이 많은 사회의 어른들, 예술을 한다는 이들에게서 느끼는 실망과 불신을 일방적으로 나무랄수만도 없었다.
물론 평화가 제작을 마치고 완성된 예술품으로 상영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떤 모욕과 멸시까지도 다 참고 견디면서 계속 겸허하고 공손하고 평화로우며 부드럽게, 오로지 중생에게 이익과 안은을 주어야 하는 것이 보살행의 한 이상이기도 하다.
S형은 『비구니』영화제작사측을 향해 『남이 싫어하는 일은 안하는 법』 이라고 했다. 나는 이 말속의 「법」 이란 말에 주의를 해주도록 부탁드린다. 불법의「법」이란 말도 뭐 그렇게 추상적이고 어려운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우주자연이란 대세계를 보면 거기에는 있어야 하는 「이치」가 있고 법이 있다. 그것은 전부 사람들이 글귀로 적어놓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것은 마음을 가다듬고 보면 법을 하나 하나가 잘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 법을 보고, 그 법이 명하는 대로 살고자 참선도 하고염불도 하며, 더더욱 어려운 계항도 지키며 사는것을 수행이라고 한다.
유행가 가사에 『안되는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이 있다. 안그래야하는 것들, 지켜야하는 법들을 안지키는 사람들이 판을 쳐서는 안된다.
아무리 제물과 명리에 때로 눈이 어두워지는 속인이라 할지라도 맑고 밝은 구석이 없으면 이 세상이 뒤집힌다는것쯤은 생각해야 할것 아닌가? 물의를 빚고 있는 제작중인『비구니』 영화문제의 해결을 위해 되씹어보는 말이다.

<영화계 입장>
한국영화에 대한 외설성이나 반공법 저촉여부로 법정사건으로 비화한 경우는 있었으나 제작진행중인 영화에 대해 제작중지 가처분신청을 낸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소송제기 이유의 포인트는 『비구니』의 성적 묘사의 외설성이다.
예술의 창작이나 표현의 자유는 우리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만큼, 특히 영화만큼 창작 소재에 구속 받는 곳은 자유국가로는 없을 것이다.
종교나 정치나 사회집단의 경우 자신을 누누이 서구적 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자신들을 대상으로 조금만 부정적으로 그리면 집단행위로써 세력 저지운동을 편 사실에 대한 기사도 아닌 허구의 세계에서 조차 그들을 다루지못한다면 예술에서의 생명력은 잃게되는 것이다.
사실 이번사건의 경우는 표현의 자유이전의 문제다. 왜냐하면 완성된 작품이 그 대상이 되어야하는데 『비구니』의 경우는 시나리오가 그 대상이기 때문이다. 영화란 필름의 미디어지 활자의 미디어가 아닌 이상 시나리오를 문제삼아 영화제작 중요요점을 정서적으로요청한다는 것은 영화인용을 예서 보면 사상내지 사고의 자유까지 간섭받는 기분일것이다.
따라서 법정시비가 되려면 영화의 검열 이후 극장 개봉이여야한다. 사실 이들이 주장하는 우리는 국민의 기본적 윤리로서 시행되는 영화검열을 통해 충분히 해소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란 시나리오상의 문장에서 미화시킨 정사장면이 치졸하고 외설적으로 보여질수도 있고. 자못 외설적인 묘사가 미적으로 승화되어 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같은 임권택감독의 『만다라』라는 영화도 시나리오만을 가지고는 이번 『비구니』보다 더욱 외설적으로 보일수 있을 것이다. 만일 『만다라』의 경우 시나리오에서 외설논쟁이 없었다면 동남아 불교국에서조차 찬사를 아끼지 않는 이와같은 작품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이 갖는 애욕을 너무 수도승과 거리가 먼 사악한 본능으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석가도 애욕으로 속을 썩인 제자 「가르다이」를 처벌하지는 않았다.
또 티베트나 인도의 사원에는 성애적 묘사의 불화나 조각이 조금도 외설스러움 없이 진열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물며 가공속의 한 비구니의 정사장면에 대해 법정시비까지벌이는것은 종교인으로서 너무 비관용적인 과잉반응이 아닌가 생각된다. 허구속의 한 여인의 정사장면 때문에 비구니나 불교계를 잘못 이해할만한 문화수준은 이미 넘어섰다. 사실 법당안에서 미련한 중생보다도 잔인한 살생행위가 현실에선 있지만 이를 보고 전 불교계가 썩었다고 보지 않는 국민의 의식수준을 볼때 이는 확실하다. 결국 외설성 문제는 표현을 그자체보다도 관객의 마음에 있는 것은 아닐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