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아르메니아 대학살 100주년…터키 그리고 일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4월 24일은 아르메니아 대학살 100주년 기념일입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1차대전 당시(1915년에서 1917년까지) 아르메니아인들이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의 강제 징집으로 동원돼 살해되거나 숨진 사건을 말합니다.

터키와 아르메니아는 100년이 지나도록 이 사건이 ‘제노사이드(Genoside, 인종대학살)’냐 아니냐를 두고 다투고 있습니다. 터키는 당시 오스만의 군대가 러시아 제국과 전쟁 중에 있어 수십만 명이 희생당했다며 제노사이드가 아니라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등 일부 국가는 역사학자 들의 연구 결과를 근거로 당시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규정하고 있죠.

하지만 많은 국가들은 터키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맹국이자 요충지에 자리한 강국이기에 터키 면전에다 ‘제노사이드’라고 말하기는 껄끄러워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터키와의 관계를 고려해 ‘제노사이드’라는 언급을 피했죠. 우리 정부도 6.25전쟁 때 터키가 한국전에 참전한 혈맹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제노사이드’라는 표현을 쓰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정세와 별개로 아르메니아 학살 100주년인 올해 들어 국제사회에서 이 사건을 ‘제노사이드’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12일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제노사이드로 규정했고, 독일 의회도 20일 ‘제노사이드’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1세기 전 오스만 제국과 연합군 관계였던 오스트리아(옛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의 의회도 21일 “오스트리아도 참혹한 사건을 제노사이드로 인정하고 규탄할 책임이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죠.

터키는 제노사이드를 언급한 나라의 대사를 소환하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아르메니아에서 열리는 기념식 날짜(24일)에 맞춰 ‘갈리폴리 전투’ 100주년 기념식을 열며 100개국을 초청하기도 했죠. 과거사를 끊임 없이 부정하며 강대국의 영향력으로 지우려는 모습입니다. 과거사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 건 일본과 비슷한 전철이지요.

뉴욕타임스(NYT)는 23일(현지시간) 이 논쟁의 배경으로 '배상금'을 들었습니다. 터키 정부가 1세기 전에 일어났던 아르메니안 대학살을 부정하는 배경에 천문학적인 배상금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대학살을 ‘제노사이드’로 인정할 경우 생존자들이나 후손들이 법적인 배상요구를 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실제로 아르메니아의 시민사회나 활동가들은 최근 몇 년간 배상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터키 정부는 100년전에 발생한 일에 대한 책임도 없을뿐더러 소송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지요. 하지만 아르메니아 쪽에선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가 배상 받은 전례를 들어 배상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미 당시 약탈의 규모나 터키로 편입된 땅의 크기 등을 조사하기 시작했지요.

터키 내·외부에서 대학살 시기(1915년~1923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는 것도 고무적입니다. 아르메니아의 후손인 미국 변호사 노라 호프세피안은 NYT와 인터뷰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들 모두 ‘정의가 행해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씀해 오셨다”며 “이제는 조류가 바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 교황청의 ‘제노사이드’ 선언을 필두로 각국에서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의 조류는 분명히 터키의 책임을 지목하고 있죠. NYT도 이런 조류가 향후 보상 논쟁에서 터키의 법적인 주장을 약화시킬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아르메니아 변호사협회가 발족한 ‘제노사이드 배상을 연구하는 모임’에 따르면 총 보상 금액은 1000억 달러(107조 8000억원)를 넘을 전망입니다. 물론 재산적 손해나 사망에 따른 고통 그리고 인플레이션 등을 고려한 계산입니다. 터키 1년 예산과 맞먹는 금액이지요. 또 다른 아르메니아 단체는 좀 더 복잡한 방식으로 피해를 추산했습니다. 사망과 물적 파괴 같은 눈에 보이는 피해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피해까지 포함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서진 교회의 복구나 바다에 대한 접근권을 잃어버린 것, 제노사이드에 대한 교육비용, 사과를 받지 못한 것 등입니다. 이런 것들을 ‘지연 손해(delay damages)’라는 이름으로 배상금에 포함시켰죠. 이들에 따르면 당시 대학살에서 이익을 본 국가는 9개 국가나 됩니다. 물론 이중 터키가 최대 이익을 얻었죠. 피해금에 대한 추산액은 무려 3조 달러. 우리 돈으로 3236조원입니다. 미국의 1년 예산이 3조 7700억 달러 가량이니 이 금액이 얼마나 큰지 감이 오시나요? 이중 터키가 부담해야 할 금액은 절반이 조금 넘는 1조 6400억달러지요.

아르메니아의 후손들이 법정에서 승소해서 보상금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물론 터키는 아닙니다. 가장 잘 알려진 케이스는 뉴욕 라이프 보험회사가 대학살로 희생당한 이들의 유족들에게 2300만 달러를 보상해 준 경우입니다. 당시 9개 아르메니아 교회와 자선단체들이 소송을 냈었지요. 지난해 9월 아르메니아 성직자들은 터키를 아르메니아 최고법원에 소송했다고 밝혔습니다. 제노사이드 기간 동안 교회의 재산을 파괴한 것을 돌려받겠다며 말입니다. 이 소송에 패하면 유럽인권재판소에 다시 소송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국력이 약한 아르메니아가 터키를 상대로 과거 대학살에 대한 사과를 받아내고 배상금까지 받을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100년이 지나도 역사적 진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국제사회의 이치가 강대국 중심으로 돌아가는 현실정치(Realpolitics)인 건 사실이지만, 역사적 진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강제 징용 피해자의 일본 기업 소송 등 일제시대 피해에 대한 배상 소송이 한참 진행 중입니다. 한국이 일본에 배상을 받는다면 아르메니아에 희망적인 선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정원엽 기자 wannab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