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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의 善 깨운 '따뜻한 기억'

중앙일보

입력

연말이다. 어둑새벽 칼바람이 볼살을 에일 듯 맵짜다. 하지만 정작 우리를 춥게 만드는 건 '모진 세상소식'이다. 부모와 이웃의 무관심 속에 아홉 살 소년이 개에 물려죽는가 하면, 세살배기가 보모의 잔혹한 손에 숨을 거두었다. 결식 아동들에게 부실 도시락은 또 뭔가. 이래도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사인 레이첼 나오미 레멘 박사는 그의 저서 '할아버지의 기도' (My Grandfather's Blessings)를 통해 "그렇다"고 속삭인다. 동시에 어두운 세상을 향해 한가닥 빛살 같은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어낸다.

레멘 박사는 우리의 유일한 안식은 '내 안의 선(善)'에 있다고 말한다. 뭔가를 기대하는 선일지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아름답고 지낼 만한 곳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세상을 편리하게 하는 것은 기술이지만 세상을 따뜻하게 회복시키는 것은 섬김과 봉사임을 갈파한다. 37년 동안 의사로 일하면서 질환조차 봉사의 한 방법임을 깨닫게 된 레멘 박사는 우리의 삶에서 일어난 어떤 일도 '의미 없는 것은 없다'고 쓰고 있다.

그의 이야기의 모태는 책 제목에 고스란히 나와 있듯 외할아버지와의 '체온을 담은 기억'이다.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는 레이첼에게 흙을 가득 담은 종이컵을 건네주며 매일 물을 주라고 당부했다. 그저 약속 때문에 아무 의미없이 물을 주던 어느 날 작게 솟아오른 싹은 큰 충격이었다. "생명은 이 세상 어느 곳에나 존재한단다.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도 생명은 숨어 있는 법, 생명을 자라게 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성실함"이라는 외할아버지의 잔잔한 음성은 오랜 시간 후 웅장한 울림으로 그의 마음을 두드린다. 이후 섬김과 봉사는 그의 영원한 화두가 됐음을 고백한다.

'침대 머리맡에 두고 밤마다 아이들에게 하나씩 들려주고 싶은 따뜻한 이야기'라는 평가에 손색 없는 이 책은 세밑 우리의 마음을 녹이고 삶에 새로운 윤활유를 부어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살만한가 보다.

레이첼 나오미 레멘 지음 | 류해욱 옮김
국판 변형 양장 | 328쪽 |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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