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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3) 제80화 한일회담(202) 김부장-수상밀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한국의 김종필중앙정보부장이 도오꾜에 나타났다』이 짤막한 외신이 현해탄을 건너 서울로 날아들 때까지 국내에서는 김부장의 잠행을 깜깜 모르고 있었다.
박정희최고회의의장과 당시의 최덕신외무·이동환 주일공사가 김부장의 일본행을 알고있는 사람의 전부였다.
이공사도 당시 정보부의 주일대표부 파견관이었던 최영택 참사관으로부터 김부장의「이께다」수상방문을 주선해달라는 극비의 협조요청을 받고 중간에서 다리를 놓았을 뿐 김부장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에 대해서는 아는것이 없었다.
김부장은 방일 이튼날인 10월25일 도오꾜의 일본의회 수상실에서「이께다」수상과 만났다. 이자리에는「오오히라」(대평) 관방장관,「이제끼」(이관) 아주국장이 배석했고 한국측에서는 중정간부였면 석정선씨와 최참사관이 수행했다.
약1시간동안의 요담이 끝난후 김부장은 만족한 표정으로 수상실을 나왔다.
이튼날 김부장은 다시 자민당의 요인 몇사람을 더 만났다. 그런후 김부장은 하꼬네(상근)에 들러 감시 여독을 푼뒤 방일 나흘만인 28일 귀국했다.
후에 한일회담을 막후에서 실질적으로 이끌어 간 주인공. 그 유명한 김-「오오히라」메모를 낳은 장본인인 김종필씨의 한일회담과의 인연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당시 혁명정부의 사실상의 제2인자가 혁명5개월만에 돌연 일본을 방문하고 온데 대해 세인들은 너나할것없이 그 진상을 알고 싶어했다. 그 궁금증은 얼마안가 곧 해소돼었다. 김부장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온지 불과 닷새만인 11월2일 일본언론들은『「이께다」 일본수상의 특사자격으로「스기·미찌스께」(삼도조) 한일회담 일본측 수석대표가 방한, 박정희최고회의의장에게 「이께다」 수상의 친서를 전달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일본언론들은 이어 다음날인 3일에는『「스기」씨가 휴대한 친서에는 박의장의 방일을 초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지난번 김중앙정보부장의 방일도 이와 관련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비록 외교소식통을 인용한 추측기사이긴 했지만 그것은 정확한 기사였다.
여담이지만 외교문제에 관한 일본언론의 추측보도라는 것은 대개 외무성 관료들의 친절한 리크에 의존하고 있었고 이번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때마침 박의장은「케네디」미국대통령의 공식초청으로 11월중순부터 방미여행에 오르게 돼있었다.
『미국에 가는 길에 일본에 들르시면 국빈으로 맞겠다』는「이께다」수상의 방일초청장은 「스기」특사에 의해 정식으로 전달되었고 박의장은 이를 선선히 받아들였다.
이상이 대충 김종필특사의 첫 일본방문에 얽힌 경위다.
필자는 주일대사로 봉직하면서,그리고 그후 외교관 생활을 계속하면서 김종필씨가 관여했던 한일회담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 그로부터 많은 얘기를 들었다. 또 이번에 한일회담에 얽힌 지난 얘기들을 정리하면서 부분적으로 확실치 않거나 궁금한 내용에 대해서는 직접 만나 확인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필자가 외무부를 떠나있었던 자유당 말기에서부터 5·16초기에 이르는 수년동안의 얘기들을 정확하게 쓸수 없었으리라.
박정희대통령이 고인이 된 지금 한일회담의 핵심이있던 김종필씨의 얘기는 그런 점에서 귀중한 증언이 될 것으로 믿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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