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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치여 살았어, 이제 나를 보여줄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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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뮤지컬 `쿠거`의 첫 장면. "갱년기 온 건 물론 우울하지. 그래도 포기하기엔 일러. 우린 우리를 탈출한 야수야"라는 도발적인 노랫말에 중년 여성 관객들의 마음도 함께 움직인다. [사진 쇼플레이]

중년여성 속 ‘여자’를 읽는 뮤지컬이 잇따라 무대에 올라왔다. 서울 흥인동 충무아트홀에서 공연 중인 ‘쿠거’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의 ‘한밤의 세레나데’다. 두 작품 모두 4060 중년여성의 깊숙한 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동년배 관객들의 공감을 끌어낸다. 2030 젊은 관객 위주의 뮤지컬계에 부는 이색 바람이다.

 ◆“가장 소중한 사람은 바로 나”=미국 뉴욕 오프 브로드웨이(예술성·사회성 갖춘 작품들을 주로 공연하는 브로드웨이 인근 극장들)에서 2012년 개막, 300회 연속 매진 기록을 세운 ‘쿠거’는 뮤지컬판 ‘섹스앤더시티’를 표방하는 작품이다. 여성들의 인생과 행복, 성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낸다. 제목 ‘쿠거(Cougar)’는 연하남을 연애상대로 호시탐탐 노리는 중년여성을 의미한다. 해가 진 뒤 어둠 속에서 먹잇감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고양이과 동물 ‘쿠거’의 습성에 빗대 북미 지역에서 쓰이는 은어다. 작품의 수위는 ‘19금’이다. 여성의 자위도구까지 등장시키는 파격적인 대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오간다. 하지만 분위기는 선정적이지 않다. 겉으로는 연하남과 사랑에 빠지는 40대 후반 세 중년여성의 이야기를 코믹하게 다룬 듯하지만, 그 내면엔 꿈을 잃어버린 중년들의 자존감 회복 과정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빈둥지 증후군에 시달리는 갱년기 여성들의 심리치료·자기계발용으로 활용해도 될 법하다. 이토록 교훈적인 콘텐트를 화끈한 오락물처럼 포장한 1962년생 여성작가 도나 무어의 내공이 놀랍다.

 중견 배우 박해미와 김선경이 번갈아 연기하는 릴리는 태어나서 한 번도 매니큐어를 발라본 적이 없다. 그의 인생은 “사라져 버린 나의 젊음. 지친 내 몸은 아이들과 남편에게 평생 치여 살았어”란 노랫말 속에 정리된다. 그런 그가 결혼기념일에 남편이 우편으로 보낸 이혼 서류를 받는다. 그 역시 남편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지만 혼자 남겨졌다는 사실 자체를 견딜 수 없어 절망에 빠진다. 그가 “그냥 살기엔 인생은 너무나도 짧아. 지금부터는 날 보여줄게. 인생의 클라이맥스 아직 오지 않았어”라며 용기를 내고,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은 바로 나. 원하는 것은 다 원하는 대로, 내가 다 정해”라며 행복해하기까지 ‘인생역전 드라마’는 화려하게 펼쳐진다.

 현재 ‘쿠거’의 객석점유율은 80%선을 넘나든다. 관객 중 60∼70%는 중년여성이다. 17일 공연을 관람한 주부 김미경(54·경기도 남양주시)씨는 “재미있고 공감된다. 혼자 남아 외롭고 쓸쓸해하던 릴리가 배우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도전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공연은 7월 26일까지 계속된다.

뮤지컬 `한밤의 세레나데`

 ◆“나도 노래하고 싶었다”=다음 달 31일까지 무대에 서는 창작뮤지컬 ‘한밤의 세레나데’는 서른셋 딸의 눈으로 본 엄마의 청춘이다.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 어느 날 과거 세계로 간 지선은 엄마의 스물다섯 살 삶을 함께 겪는다. 임신으로 가수 활동을 못하게 된 뒤 “나는 답답하고 한심한 아줌마 돼버렸다. 니 그거 아나? 나도 노래하고 싶었다”고 하소연하는 젊은 엄마의 모습이 낯설지 않아서일까. ‘억척스런 순댓국집 아줌마’인 엄마가 ‘한때는 여자였고 꿈많은 청춘이었다’는 ‘당연한’ 주제로 중년 관객들을 웃기고 울린다. 주부 관객들의 호응에 힘입어 17일엔 오후 4시 낮 공연도 진행했다. 작품의 대본을 쓰고 직접 연출을 한 오미영 극단 ‘오징어’ 대표는 “자식을 낳고 자신을 희생하는 엄마의 정체성으로 사는 기간이 긴 여성 삶의 속성이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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