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안전한' 영어로 말하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내가 통역사이지만 참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 political correctness다. 정치적 정합성, 공적 표현, 차별 없는 표현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는 걸 보았다. 원래는 언어나 용어 자체로 성별, 인종, 특정 문화 그룹을 소외.차별.모욕하는 것을 막자는 취지에서 생겨난 일종의 정치.문화적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언어는 우리의 생각을 지배한다. 예를 들어 fireman이라고 하면 무의식중에 소방관은 늘 남성이라고 생각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firefighter라고 중성적인 말을 쓴다. 이런 표현의 변천은 우리 언어생활에서도 겪고 있다. 장애인을 장애우라고 한다든지, 광주사태를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다시 명명한 것도 다 political correctness를 지향하는 표현들이다.

소수집단의 권익과 차별 방지에 더 예민한 사회에서는 이런 표현이 더 발달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는 외국어로만 영어를 배우지 외국 문화로의 영어에는 상대적으로 무심하다 보니 국제무대에서 세련된 언행을 구사하기 어렵지 않나 싶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외국생활도 오래 했고 영어도 유창한 사람이라도 특히 취약한 영어표현이 여성과 관련된 부분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제회의에서 여성이 의장을 맡으면 우리나라 발언자들이 고생했다. Mr. Chairman이 입에 붙어 Madame Chair가 안 되는 것이다. 국제 위상이 높아져 우리나라 사람이 의장을 맡은 어떤 회의에서는 인도 대표가 발언권을 신청하자 "미스 인디아"라고 호칭했다가 나는 미스 인디아가 아닌 인도 대표라는 그녀의 항의를 받아야 했다. 그 대표가 남성이었다면 "미스터 인디아"라고는 안 했을 듯싶다. 미인대회 후유증일까? 최근 한 국제회의에서는 우리나라 발표자가 동료 교수인 한 여성을 소개하며 나이가 얼마인데 미혼이니 주변에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청중은 "와" 웃는데 외국 청중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공적인 자리에서 지극히 사적인 개인의 나이와 결혼 상태를 밝히고 공개적으로 배우자를 구한다는 것은 영미권에선 유머로 받아들이기에 상당히 힘든 부분이 있다.

국제회의에서 영어 쓰는 것도 힘든데, 문화적으로 허용되는 말까지 가려서 해야 한다니 정말 피곤한 일이다. 영미권에서도 이런 비판이 있다. 미국 인디언과 흑인은 American Indian과 black이 아니라 Native American, African American이라고 해야 하고, girl friend, boy friend마저도 그 사람이 동성애자일 경우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partner로 부르자고 하니 그들도 힘들다. 일각에서는 political correctness는 좌파 이데올로기의 언어를 강요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어찌 됐건 우리는 국제무대에서 활동해야 하는데, '안전한' 영어는 무엇일까? 우리가 상식의 수준에서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남을 웃음의 소재로 삼는 것보다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유머가 공식석상에서 '안전하고' 격이 있다. 또한 국제무대에서의 여성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졌음을 조금만 의식해 행동한다면 크게 국제 매너에 어긋나지 않을 듯싶다. 타자에 대한 배려는 언어, 문화권을 초월해 통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배유정 방송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