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으랏차차 '88세 청년' 35. 태릉선수촌<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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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태릉선수촌 건설 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를 필자가 안내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운동 선수의 훈련을 목적으로 만든 첫 조직은 1963년 1월 31일 결성된 훈련단이다. 임원 63명과 선수 323명. 도쿄올림픽에 대비한 조치였다. 미약하나마 대한민국 체육사에 전환점이 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훈련단을 위한 훈련장이나 시설.기구 등은 준비돼 있지 않았다. 훈련장을 빌려야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늘은 경희대 운동장, 내일은 서울고 운동장으로 옮겨다니는 식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예정에도 없는 로드워크로 시간을 때우기 일쑤였다.

서울 동숭동의 합숙소는 내가 체육회장으로 취임하기 6개월 전인 63년 5월 290만원을 주고 사들인 목조 건물이었다. 서울대 문리대 뒤쪽, 지금은 'N가든'이라는 갈비집이 들어선 뒤에 있었다.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이 합숙소로는 선수를 모두 수용할 수 없어 이웃집을 전세로 얻어 사용하기도 했다.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많은 선수가 한꺼번에 모일 장소도 없었고, 주로 교외에 있는 훈련장을 오가려니 길에 뿌리는 시간이 많았다. 농구 같은 실내종목은 그나마 연세대를 비롯해 시내에 있는 대학 체육관을 사용할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도움으로 태릉에 선수촌 터를 마련한 나는 서둘러 일을 진행했다. 65년 10월 오성건축사무소에 설계를 의뢰하고 11월 5일 공개 입찰을 통해 경일기업주식회사에 1차 공사를 맡겼다. 재원이 충분치 않아 일시에 온갖 공사를 병행할 수 없었다. 1차 공사는 2층으로 된 본관과 선수 숙소 두 동, 목욕탕 한 동, 배수시설 및 전기 공사로 이루어졌다.

본관엔 사무실.의무실.휴게실.식당.도서관.오락실.창고가 들어섰다. 선수 숙소는 한 동에 48명의 선수와 두 명의 임원이 지낼 수 있게 했다.

2차, 3차, 4차 공사가 진행되면서 선수촌은 점차 그 위용을 드러냈다. 선수 숙소가 여섯 동으로 늘었고 외국인 코치를 위한 숙소도 따로 지었다. 국제 규격의 실내수영장과 네 개의 실내체육관, 테스트룸, 서키트 트레이닝센터, 육상 트랙, 테니스 코트, 승리관, 월계관 및 부대시설이 착착 완공됐다. 이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예산이었다. 수중에 돈이 없었다. 특히 실내수영장을 건설하느라 노심초사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입안의 침이 마른다.

예산 부족으로 수영장 공사가 차일피일 미뤄지는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이 격려차 선수촌 건설 현장을 방문했다. 이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었다. 브리핑을 하면서 박 대통령이 충분히 알아듣도록 애로 사항을 털어놓았다.

박 대통령은 "꼭 필요하다면 저질러 놓고 보라"는 묘한 말을 남기고 선수촌을 떠났다. 나는 사실상 '지불 보증'과도 같은 대통령의 이 한마디를 120% 활용했다. 수영장 건설이 활기를 띠었다. "꼭 필요하다면 저질러 놓고 보라"는 말은 한동안 체육계에서 금과옥조로 통했다.

나는 또 한 번 무리를 했다. 국제 규격의 아이스링크를 구상한 것이다. 72년 일본 삿포로에서 열리는 겨울올림픽에 대비하고 싶었다. 우리는 이 대회에서 북한과 대결할 가능성이 컸다. 야외 링크에서는 한겨울에 한 달 남짓 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스링크에서는 훈련 기간을 5~6개월로 늘릴 수가 있었다. 70년 4월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1만5000평의 대지를 추가로 임대, 두 달 뒤 공사를 시작했다. 예산은 2억5000만원. 시공업체는 경일기업이었고, 준공일은 71년 2월 20일이었다. 늘 그랬듯이 공사는 '외상'으로 진행됐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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