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민족 고대(高大)'가 민족주의 해부한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원장 김흥규)이 8일(목) 오후 1시 '한국학의 정체성 대토론회'를 개최한다. 장소는 고려대 백주년기념관 국제회의실. 토론회는 한국의 민족주의를 본격적으로 비판의 도마에 올렸다는 게 특징이다.

올해 개교 100주년을 맞은 고려대는 흔히 '민족 사학(私學)''민족 고대(高大)'라는 말로 통해 왔다. 따라서 민족주의의 한계를 짚는 이같은 행사는 눈길을 끈다. 학술회의의 비중을 '민족주의'에 모아놓고 적당히 '탈(脫)민족주의'로 구색맞추는 식이 아니다. 민족주의로 도배해 온 지난 세월 한국학의 현주소를 제대로 한 번 따져보자는 자세다.

학술회의의 공식 부제를 '민족학, 지역학 또는 해체'로 정했다. 한국학에 대한 민족주의 관점, 동아시아 지역학의 관점, 그리고 탈민족주의 관점 등을 모두 펼쳐보인다.

각 분야 담론을 주도해 온 학자들이 대거 나섰다. 민족주의 계열의 서중석(성균관대 한국사) 교수, 탈민족주의 계열의 임지현(한양대 서양사).김철(연세대 국문학) 교수,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학 담론의 최원식(인하대 국문학).백영서(연세대 중국사) 교수 등이다. 참가자 수로 보면 민족주의 쪽이 열세다.

요즘은 대개 민족주의를 말해도 그 앞에 '열린'이란 형용사를 붙인다. '닫힌 민족주의'의 폐단이 대체로 인정되는 분위기다. 무엇이 닫혔다는 것인가. 한국 사회를 민족이라는 단일 잣대로만 보는 획일성.집단성을 문제 삼는다. 이에 대해 민족주의 진영은 민족 통일이 민족 최대의 과제임을 내세워 한국 사회에서 민족주의 담론이 유효함을 강조한다.

최원식.백영서 두 교수의 동아시아 담론은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 중간에 위치한다. 한반도 분단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시각을 동아시아 차원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 이들은 민족주의의 역사적 의의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 민족주의가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데 장애가 될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이날 회의에서 가장 주목되는 이는 최장집(고려대 정치학) 교수다. 그는 민족주의 쪽은 아니지만, 진보 학술계의 대표적 학자라는 점에서 민족주의 진영 인사들과 친화력이 있다. 미리 배포된 발제문에서 그는 민족주의나 탈민족주의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대신 원론적이며 뼈아픈 자성의 비판을 제기했다. 한국학 연구자들이 세계적 수준과 어깨를 나란히 할 성과를 먼저 내놓고 난 후에 정체성 문제를 따지자고 했다. "우리는 무엇을 주장할 만한 학문적 성과와 내용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는 특히 연구자 스스로 재단하는 이데올로기 검열 자세를 경계했다. 연구를 시작하기도 전에 진보니 보수니 민족주의니 하는 잣대로 검열을 해선 좋은 성과를 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후기부터 한국전쟁 시기까지 역사 분야의 구체적인 저술들을 예로 들며, 높은 수준의 학문적 성취는 주로 해외학계에서, 특히 미국의 한국학계를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진단했다.

배영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