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981》|제80화 한일회담(180)|끝내 북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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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59년 12월14일-. 북송 제1진9백75명을 나누어 태운 소련 선박 크리리온호와 토보르스크호는 니이가따항을 떠나 북한의 청진을 향했다.
캘커타 협정에 의한 북송 사업이 끝난 67년12월22일 1백55회의 마지막 배선때 까지 총8만8천6백11명이 공산 치하로 추방되는 단서를 열었다.
총8만8천6백11명중에는 한국인과의 혈연 관계로 일본적을 가진 사람들도 6천6백42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캘커타협정에 따른 북송 신청자는 14만1천8백92명 이었으나 △신청 취소자 2만3천3백83명△의사 변경자 1만2천4백96명 △송환 만료자 1만7천4백92명이었다.
일본은 캘커타협정 유효시 미 송출된 북송 희망자를 북송시킨다는 방침아래 71년2월 모스크바에서 일·북한 양적 간의 회담을 열고 북송재개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71년2월부터 10월까지 6차례에 걸친 배선으로 1천91명을 북송시켰다. 따라서 이 숫자까지 합친다면 59년의 북송 정책으로 북한으로 간 재일교포는 사실상 총8만9천7백2명인 셈이다.
이 북송 관계를 정리 하면서 느낀 점을 몇까지 애기해 본다면 우선 일본에서도 북송 관계에 관한 단행본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렇게도 사소한 주제에 대해 다양한 책을 내놓는 일본인들이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책이 거의 없다는 점은 특이한 일이다.
더욱이「기시」수상의 회고록을 보면 1페이지로 간단하게 언급했으며 일본 외교사조차 사실 언급에 그치고 있다. 또 다른 감회는 아주 최근에 있은 사태 발전이다.
「나까소네」(중회근강홍) 일본 수상은 최근 중공을 방문해 호요방 중공당 총서기에게 기막힌 간청을 했다고 일본 신문들이 전했다.
「나까소네」수상은 호총서기에게 북송 당시 남편을 따라 북한으로 간 1천8백여 일본인 처의 일본 방문을 주선토록 간청했다고 한다.
북한측은 이들의 생사 안부조차 일본의 가족들에게 알려 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인도주의란 미명아래 기세 등등하게 북송을 강행했던 일본 외무성과 일적조차 지금까지 1천8백여명 중 9명의 안부만 확인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까소네」 수상은 5월로 예정된 호 총서기의 평양 방문 때 김일성에게 잘 말해 안부나마 알 수 있는 길을 터 달라고 부탁한 셈이다.
남의 눈에 가시를 찔러 피를 흘리게 한 역사의 죄업을 받는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악담이 될 터이지만, 이 사안만을 놓고 보면 그 말은 과히 틀리지 않는 평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지금 생각하면 더욱 가관이었던 것은 북송1진과 함께 평양에 특파됐던 일본 기자들이 도착 르포를 통해 『일본인 아낙네들의 걱정이 사라졌다』고 송고해 그것이 제목으로 대서 특필 됐던 사실이다
아사히 (조일) 신문의 인강덕랑 특파원은 평양의 재건상에 경탄을 금치 못해 부자도 걸인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송고 했다.
그래서 북한에 대해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던 일본인처들 조차 그 불안이 기우였음을 알고 안도하고 있다는 투로 일본 기자들은 보도했던 것이다.
이제 일본 신문들도 걱정이 없던것으로 묘사했던 그들의 동족의 안위에 대해 거꾸로 걱정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되새김질하는 사태에 이른 것이다.
재일 한국인을 한명이라도 더 일본땅에서 추방하려던 그 광기의 일본인들에게 북한이 오히려 매서운 교훈을 안겨주고 있다는 것도 여간 역설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갖은 학대와 차별에 시달리다 못해 공산치하로 간 수많은 동포들이 북한에서 겪은 고난은 무엇으로 보상해야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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