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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 정신대 |노수복 할머니 원한의 일대기(5)|지옥의 문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내가 싱가포르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온몸에 감겨오는 무더위로 눈을 떴다 낯선 아침풍경에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였다. 내가 누워있던 간이 군용막사 밖에서 수심명의 일본군인들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도라지타령 불러>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우리가 깨어난 것을 본 군인들은 저들끼리 목청을 높이며 떠들어대기 시작했고 어떤 군인은 우리가 들어있는 막사로 쳐들어올 기세였다.
우리는 서로 한 덩어리가 돼 껴안고선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달래며 인솔자를 기다렸다
어제 우리들을 이곳으로 데려왔던 인솔자는 날이 밝아서도 한참 뒤에 나타났다.
그는 어제의 다정한 태도와는 달리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오늘 저녁에 군인위안 노래잔치가 있다』 『준비를 해둬라』고 말했다. 우리 중에 하나가 노래잔치가 뭐하는 것이냐고 묻자 인솔자는 손찌검을 할 자세로 윽박지르고는『잔말말고 준비나 하라』고 소리지르고 그냥 가버렸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군인들이 넓은 연병장을 꽉 매웠다.
인솔자는 우리를 다그쳐 빨리 연단에 나가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노래할 줄 모른다』고 하자『빨리 연단에 올라가지 않으면 나중에 재미없다』고 을러대 할 수 없이 우리6명은『도라지타령』『아리랑』등을 대충 불렀다. 연병장의 군인들은 우리들의 서툰 노래에도 흥에 겨워 춤을 추는등 점차 분위기가 들뜨기 시작했다.

<문은 밖으로 잠가>
어떤 군인들은『조오센진 아다라시 이찌방』(조선처녀가 제일이다) 이라고 소리쳤다. 이 말은 처음엔 칭찬으로 알았다. 그러나 뒤에 안 일이지만 일군병사들 사이에는 조선처녀를 접한 뒤 전장에 나가면 부상하지 않는다는 미신이 있어 칭찬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치욕스런 말이었다.
한시간 가량의「노래잔치가 끝난 뒤 우리 6명은 인솔자에 이끌려 사령부본부 가까이의 막 사로 갔다,
거기서 방 하나씩을 배정 받은 우리는 잔치 뒤에 쉬라는 줄로만 알았는데 금방 사정이 달라졌다.
조금 있으려니 내가 든 방문이 열리며 견장과 계급장이 번쩍이는 장교 한사람이 들어왔다 첫인상으로 인정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사정이 예사롭지 않음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가를 그제 서야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 장교에게『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것은 허사였다. 몇 차례의 실랑이 끝에 주먹질과 발길질에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나는 이미 딴사람이었다. 정신대원의 지옥 같은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복받쳐 오르는 설움으로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한동안 맺힌 한을 모두 토해내듯 한껏 울었다. 울고 나니 약간은 속이 후련한 것 같았다.
잠시 후 인솔자가 나타나 일본말로 뭐라고 한참 야단을 치더니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어제 싱가포르에 도착해 첫날 잠을 잤던 간이 막사였다.
거기에는 다른 여자들도 이미 와 있었다. 옷매무새 등이 나와 마찬가지로 곤욕을 치른 것같았다.
인솔자는 내가 방에 들어서기 무섭게 나의 뺨을 때리고 머리채를 쥐어 흔드는 등 소란을피우더니 문을 밖으로 걸어 잠그고 가 버렸다.
우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꺼번에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울면서 꼬박 밤을 지샜다. 앞일이 막막할 뿐이었다.
현재 내가 살고있는 태국의 핫 차이는 평화스럽기 그지없는 곳이다.
도시 이름마저 태국말로「핫」은 해변을,「야이」는 크다는 뜻을 가진「큰해변」(발음은 핫 차이로 한다) 이다.
이 핫 차이로 멀리 고국에서 기자가 찾아 왔을 때 이처럼 평화로운 마을에서40년 가까이
살아온 내가 정말로 나의 과거를 속속들이 털어놓아야 하느냐며 고심했다.
그러나 나는 과거가 조금치도 내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다는 자문자답 끝에 나의 정신대 생활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나는 이미 환갑이 넘었지만 여자로서의 수치가 없을 수가 없다. 그러나 개인의 수치스런 과거가 아닌, 역사를 바르게 알린다는 각오로 그런 결심을 한 것이다.

< ″살아남자〃다짐>
어쨌든 나는 그 이후 일본군병정들의 제물이 돼 고난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하루일과는 아침에 일어나 군인들의 옷을 세탁하거나 막 사 청소를 해야했고 오후에는 탄약통 져 나르기 등 중노동에도 동원 됐다. 그리고 어떤 날엔 오후부터 밤까지, 또 어떤 때는 아침부터 밤까지 나의 막사를 찾는 일군을 맞아야 했다.
그런데도 감독자가 된 그 일인 인솔자는 수시로 트집을 잡아 매를 때렸다. 심할 경우엔 옷을 모두 벗기고 회초리로 때리거나 병정들이 있는 연병장으로 끌고 가 반나로 머리에 양동이를 뒤집어 씌우고선 매를 때렸다. 지금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그러나 나는 물론 같이 동행한 우리 정신대원」들은 모두 이를 악물고 참았다. 우리들의 일념은 오로지 『살아 남아야 겠다』는 것 뿐이었다. 【핫 차이(태국=전종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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