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부모의 고통은 나의 고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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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지난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중3 딸아이는 'god 백회 연속 콘서트'가 열리는 서울 정동극장으로 나를 이끌었다.

공연이 시작되자 극장 안은 학생들의 함성과 몸짓으로 열기가 가득했다. 어느 순간 극장 전체가 숙연해졌다. '어머니'라는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그해 가을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6년 동안 치매와 전신마비로 고생하시던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겨울은 추웠다.

"집에 가자. 부엌에 쌀이 있어. 밥해줄게."

어머니는 치매를 앓으시면서도 늘 우리 4남매를 키운 유성 고향집으로 가고 싶어 하셨다. 미동하기도 어려운 몸이었지만 자식들에게 손수 밥을 지어 먹이고 싶던 거였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내 몸이다. 나는 어버지와 어머니의 몸의 일부가 합쳐져 태어났다. 그러니 자식이 가시에 손가락을 찔려 울면 부모가 더 아파하고, 부모님이 고통스러워 할 때 자식 맘도 아플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모는 또 자식을 먹이고 입혀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든다. 누군가 자식의 입으로 밥이 넘어가는 것을 볼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던가.

효는 다른 게 아니다. 나에게 몸을 주고 키워주신 부모에게 감사하고 보답하는 도리일 따름이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뇌출혈로 쓰러지신 뒤 일어서지를 못했고, 판단력이 점점 흐려졌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고, 수저조차 들지 못했다. 마지막에는 물 한 모금도 삼키지 못했다. 자식이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의 역순이었다.

나는 당신께서 내게 해주셨던 그대로 대소변을 받아내고 미음을 입에 넣어드리고 돌아가신 뒤엔 선산의 아버지 곁으로 보내드렸다.

우수한 성적.건강.성공 등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게 효행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효의 본질은 부모님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아파하는 '한몸 되기'다.

어머니라는 이름만 생각해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은 어머니가 나의 고통을 당신의 고통으로 아파하셨기 때문이다.

치매에 걸렸다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한다고 어떻게 부모를 버릴 수 있겠는가. 그것은 나를 버리는 행위다.

최영진 성균관대 교수.유학·동양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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